개인적으로 주말에 TV를 통해 방영되는 영화정보 프로그램들에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출발! 비디오 여행> 정도만 방영되던 초기에는 TV를 통한 영화정보의 습득이 주는 매력에 열렬한 팬임을 자처하기도 했었지만, 언젠가부터는 그 정반대의 입장에 서길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변화를 가지고 온 것은 ‘신작 영화 소개’라는 명목 아래 개봉영화들의 주요 장면들을 줄거리와 함께 소개해주는 코너들이 선보이면서였다. 물론 그 전에도 이런 코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2/3 정도 되는 지점까지의 이야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화면과 함께 설명해주는 일이 당연시되었던 것이다. 그런 일종의 ‘스포일러’성 코너들의 등장에 대해 영화를 아끼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시해왔지만, ‘경쟁이라 어쩔 수 없다’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전혀 변화가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 대항해 개인적으로는 반드시 볼 영화라면 개봉영화 소개 코너나 신문의 영화정보 기사들을 절대 읽지 않는다는 철칙을 만들어 지키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그런 철칙이 가끔 깨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 얼마 전 공중파 방송이 아닌 케이블 방송의 모 영화 정보 프로그램에서 <어댑테이션>을 소개하는 코너를 보게 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물론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면 당연히 채널을 돌렸겠지만, 네살짜리 아들 녀석과 소파 위에서 씨름(?)하며 한귀로 흘려듣고 있던 터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문제는 다른 내용은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는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찰리의 동생 도널드는 시나리오 작가의 분열된 자아를 표현해…’라는 문장이 머리에 또렷이 각인되었다는 것. 그뒤부터 나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1인2역으로 연기한다는 동생이 일종의 가상인물이군.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존재하는…’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식스 센스>처럼 영화 막판에 그런 사실이 밝혀지는 게 묘미인데, 미리 알아버렸다고 후회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그건 내 오해였다. 워낙 복잡한 설정의 영화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었는데,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던 내가 너무 극적으로 해석을 했던 것이다.
<어댑테이션> 공식 홈페이지.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찰리 카우프만(사진 왼쪽). <난초도둑>의 모델이 되었던 존 라로쉬(사진 오른쪽).
촬영현장에서 니콜라스 케이지를 만난 <난초도둑>의 저자 수잔 올린.
사실 <어댑테이션>은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많이 혼란스러운 영화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촬영현장 모습이 나오고 거기에 실재 작가인 찰리 카우프만을 연기하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이 영화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영화인지를 잘 설명해준다. 따라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소재 그리고 상황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주요 등장인물들에 대한 부분부터 이야기하자면 대부분이 실존 인물들이다. 찰리 카우프만은 말할 것도 없고, <난초도둑>(The Orchid Thief)을 쓴 수잔 올린(메릴 스트립)과 책의 주인공인 존 라로쉬(크리스 쿠퍼)도 실존 인물이다. 또한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영화사 간부 발레리 토머스 역시 실존 인물이다. 심지어 허구적인 인물의 전형인 것처럼 보이는 시나리오작법 강사 로버트 맥기조차 실존 인물이다. 그들을 제외한 주요 인물들 중에서 단 한 사람, 찰리의 동생으로 등장하는 도널드만 확실히 허구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실존 인물들 모두가 이 영화에 자신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아주 흥분했었다는 사실이다. 로버트 맥기나 발레리 토머스는 자신의 실재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사실. 문제는 막판에 마약과 섹스 그리고 살인에 빠져드는 인물들인 수잔 올린과 존 라로쉬의 경우였다. 찰리 카우프만조차 시나리오를 그들에게 보내놓고, 어떤 반응이 올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밝혔을 정도. 이 영화의 시사회에 참석한 두 사람에 대해 ‘자신과 다른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따위의 질문이 쏟아졌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수잔 올린의 경우 “처음에는 놀랐다. 나중에는 차츰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판까지 부모님이 보시면 어떤 생각을 할까 고민했었다. 다행히 두분 다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이셨지만”이라고 담담하게 답변을 했다. 존 라로쉬의 경우는 “도저히 영화화가 불가능해 보이는 책을 가지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자신의 캐릭터에는 별반 신경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영화 속의 다양한 설정들에는 허구와 진실이 혼재되어 있다. 일단 찰리 카우프만이 <난초도둑>의 각색을 의뢰받아 고민하는 설정은 100% 사실이다. 단 영화의 촬영현장에서 그가 사람들로부터 약간 무시당하는 듯한 장면들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대부분의 경우 배우를 비롯한 촬영 스탭들이 시나리오 작가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최대한 예의를 보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 영화사 간부 발레리가 수잔 올린을 만나 책을 영화화하고 싶다고 말하자, 수잔이 놀라는 장면도 현실적이지 못하다. 영화사 간부를 만나러 나오면서 그걸 기대하지 않는 작가는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수잔이 시나리오를 직접 쓸 자신이 없다고 말하자 발레리가 “이미 각색할 사람을 알아놓았다”라고 말하는 장면도 현실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할리우드의 암묵적인 에티켓은, 그런 경우라고 하더라고 원작자에게 생각해볼 시간을 주거나 최소한 각색을 공동으로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존 인물들과 가상의 설정들이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할리우드 자체를 무대로 한다는 측면에서 <어댑테이션>은 근래에 보기 드문 ‘잘 만들어진 영화를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영화가 대작들에 밀려 극장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점은 아쉬움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이철민
<찰리 카우프만 되기> 홈페이지 : http://www.beingcharliekaufman.com
<어답테이션> 공식 홈페이지 : http://www.sonypictures.com/homevideo/adaptation
수잔 올린 공식 홈페이지 : 111
http://www.susanorlean.com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강좌 공식 홈페이지 : http://www.mckee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