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퀴어 감독이라고? 그건 언론이 만든 거다"
토드 헤인즈는 확실히 변했다. 그의 장편 데뷔작 <포이즌>은 ‘히어로/호러/호모’를 소제목으로 하여 삼항간의 면면을 분석적인 방식으로 깐깐하게 대비시킨 영화였다. <포이즌>으로 토드 헤인즈는 데릭 저먼이 세워놓은 정치적, 미학적 성과에 필적할 만한 퀴어영화 감독 반열에 올라섰고, 관객과 평단은 그의 다음 영화에서 더욱 정치한 주장과 전개를 예상했다. 하지만 토드 헤인즈는 이후의 진전을 깊이에 두기보다 너비에 두었고, 성 정체성과 섹슈얼리티의 화두는 새로운 접점을 연계하면서 넓어졌다. 줄리언 무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스릴러영화 <세이프>(1995)에 이어, 토드 헤인즈는 ‘글렘 록’의 전성기를 배경으로 한 픽션과 논픽션의 장엄한 사기극 <벨벳 골드마인>(1998)을 통해 시대적인 대중문화 코드를 재소환했다.
70년대 영국 대중문화를 빌려 외적 스타일의 화려함을 마음껏 확장해보았던 토드 헤인즈가 이번에는 20년 전으로 더 거슬러올라가, 1950년대 미국 아이젠하워 시대의 코네티컷을 배경으로 <파 프롬 헤븐>을 만들었다. 제목에서 풍겨나오는 것처럼 <파 프롬 헤븐>은 1950년대 가족 멜로드라마(Family Melodrama)를 이끌었던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에 기본적인 스토리와 스타일을 기대고 있다. 더 정확히는 1950년대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가 숨겨놓았던 동성애적 암시를 있는 그대로 펼쳐놓고, 2000년대의 시각으로 1950년대의 문화를 들여다본다. 이미 파스빈더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늙은 독일 여자와 천한 아랍 남자의 비극적인 사랑으로 옮겨본 그 이야기를 토드 헤인즈는 다시 한번 자신의 방식으로 번역해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퀴어영화 감독으로서의 토드 헤인즈, 그가 더글러스 서크의 가족멜로드라마 장르를 차용하여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 그 변화의 지점은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등의 궁금증을 실어 그와의 서면 인터뷰를 시도했고, 그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 이 영화의 구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나는 늘 50년대 멜로드라마의 거장 더글러스 서크의 스타일에 흥미를 느꼈다. 50년대 모델의 자동차를 좋아하는 녀석들 중 하나는 아니었으니 그 시절을 동경한 것은 아닌 듯하지만…. 나는 더글러스 서크의 작품을 대학 때 처음 접했다. 더글러스 서크의 스타일은 굉장히 매력적이었지만, 그때는 그의 작품 혹은 여성영화만이 아닌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표현해야 한다고 느꼈었다. 1991년작 <포이즌>, 1995년작 <세이프>, 그리고 바로 전작 <벨벳 골드마인>까지 이어지며 그렇게 좀더 넓게 생각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 시절 내가 가장 흥미를 느끼며 모방하고 싶었던 스타일을 감히 시도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시대의 멜로드라마를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이다.
당신의 영화 <포이즌>을 처음 봤을 때 날카로우며 지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정서의 폭이 더 넓어지고, 주장은 그만큼 부드러워진 것 같다. 그동안 영화관이나 세계관에 변화가 있었는가. 나의 첫 작품 <포이즌>은 상당히 특별한 영화이다. 처음이라는 것은 소신과 욕심을 수반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좀더 영화 내용이나 표현방식이 순화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이즌>과 <피 프롬 헤븐>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포이즌>은 섹슈얼리티를 강조하였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파 프롬 헤븐>은 여성멜로드라마이다. 당신이 부드러워졌다 함은 그런 이유에서인 것 같다.
이 영화는 캐릭터가 중요한 영화이다. 배우 선정에도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데니스 퀘이드와 줄리언 무어가 영화 속 주인공인 프랭크와 캐시 역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줄리언 무어는 두말할 것 없이 ‘최고의 여배우’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배우이다. 이미 전작 <세이프>에서 같이 일한 경험이 있고 난 그녀의 연기가 매우 흡족했었다. 그녀는 영화 속 인물로 충분히 흡수되는 능력을 지닌 몇 안 되는 배우 중 하나이며, 또한 예쁘지 않은가? 특히 <파 프롬 헤븐>의 캐시는 그녀만이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데니스 퀘이드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다른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지만 난 그가 오스카의 주인공이 될 줄 알았다. 그만큼 그의 연기를 높이 평가한다.
배우들에게 연기지도할 때 어떤 점을 강조했나? 예를 들어, 줄리언 무어가 1950년대 아이젠하워 시대, 미국의 가정주부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모델이 필요했을 것도 같은데. 미국의 50년대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를 모델로 하여 캐릭터를 설정했지만, 그 시대의 영화 속 인물들은 현실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다. 인위적인 감정과 삶을 표현하며 목소리톤도 한결같다. 더글러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 에서 주인공 제인 위맨의 캐릭터도 이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배우들이 그 시대를 완벽히 재현해내길 바랐다. 그래서 데니스 퀘이드에게는 조금 더 경쾌한 목소리 연기를, 줄리언 무어에게는 감정의 변화에서 호흡이 길지 않을 것을 주문하였다. 50년대 미국사회의 실정에서 캐시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건들이다. 캐시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힘들고 안타까운 감정인지 한국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되길 바란다.
우리는 당신을 퀴어영화 감독으로 알고 있다. 그 말은 항상 당신의 영화 속에 현실의 섹슈얼리티 편견에 대해 발언하는 강한 저항적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영화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영화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어떤 점에 주목해야 할까. <파 프롬 헤븐>은 지금까지 내가 보여준 영화의 스타일에서 조금은 벗어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전작들에서 보여진 느낌이 그렇게 강한 것이었나? 그렇다면 <파 프롬 헤븐>에서는 조금 다른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또한 나를 퀴어영화 감독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언론의 힘이 컸기 떄문이다. 이 영화에서 섹슈얼리티나 사회적 편견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사회적 편견과 캐시 자신의 의식 속에 존재한 가치에 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캐시의 내러티브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프랭크의 내러티브는 주변으로 밀어놓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인가. <파 프롬 헤븐>은 여성영화임이 분명하다. 프랭크의 이야기는 캐시의 이야기를 도와준다. 50년대 여성멜로드라마는 모든 인물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려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내러티브를 보여줌으로써 한 인물을 부각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파 프롬 헤븐>은 행복한 삶을 살던 중산층의 가정주부 캐시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든 주변 사람들의 편견,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 가족의 의미 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첫 시퀀스를 보며 ‘아이러니’의 화법으로 영화를 끌고 갈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 물론 그 예측은 틀렸다. 그렇다면, 전체적인 영화 톤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점은 무엇인가. 캐시는 가족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자신의 감정을 끝내 숨기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이것이 그 시대 여성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지극히 전통적인 인물들의 의식구조가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 줄거리축의 균형이 가장 고려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특정한 ‘문화’로 대변되는 시대에 창조적으로 개입하여 그 시대의 인물들을 재구성하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벨벳 골드마인>의 글렘 록 시대, 50년대 미국의 백인 부유층 문화. 한마디로, 문화를 다루는 데 능숙하다. 당신의 영화 속에서 ‘문화’란 어떤 중요성을 갖고 있는가. 문화가 바로 스토리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문화이고, 문화는 곧 개개인의 삶을 지배한다. 그 인물들의 삶을 묘사한 것이 영화의 내용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영화는 문화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영화에서 문화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의 큰 틀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이 밖에 현재 당신이 관심을 갖고 있거나, 해부해보고 싶은 시대 또는 문화가 있다면. 예전부터 오리엔탈 문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왔다. 동양적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지만 아주 독특한 문화로 여겨진다. 특히 한국의 문화는 상당히 아름답다고 들은 바 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한 대로 영화로 표현된다면 동양 문화를 제대로 숙지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다.
이 영화의 장면들은 인공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이런 장면을 연출해내기 위해서 촬영기사(DP)와 무엇을 가장 중점적으로 논의하는가. <파 프롬 헤븐>은 굉장히 아름다운 영상을 보여준다. 많은 부분이 모두 이 영화의 영상을 위해 동원되었다. 샌디 파웰이 보여준 강렬한 색깔의 의상들과 50년대를 대표하는 먼지 하나없는 소품들. 촬영감독 에드워드 래치맨과 이야기한 것은 배경과 인물과 그 이외 소품들간의 ‘조화’였다.
1950년대 더글러스 서크의 가족멜로드라마는 이데올로기적 안전장치(보수주의, 부르주아적 욕망)와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모순(편견과 차별)을 동시에 드러내는 영화적 형식이다. 그런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를 가져와 당신이 드러내고자 했던 현재의 이미지는 무엇이었나. 50년대 시간을 들여다보며 우리는 몇 가지 부분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50년대 테마영화나, 책들, TV쇼를 보면 그 시대보다 지금이 얼마나 진보적인 사회인지 다들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 속 시대는 분명히 지금 우리에게는 아주 겁나는 시대처럼 보인다. 그 시절을 둘러봄으로써 50년대 모드로 돌아가서 가정으로 돌아가자! 라고 외치고 싶다. (웃음)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봤을 것이다. 당신은 그와 어떠한 차별화된 방식으로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적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가. 서크의 영화 속 여성의 캐릭터는 주변의 상황과 행동으로 내용을 이끌어간다. 그 이후 파스빈더는 서크의 영화 속 캐릭터에게 생각을 부여함으로써 좀더 사실적인 영화를 그려냈다. 나는 2000년대에 스며 있는, 그러나 완벽히 재현된, 50년대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파스빈더는 캐릭터를 살렸고, 나는 캐릭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더욱 섬세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여성관객에게 멜로드라마는 쾌락을 즐기면서 한편으로는 저항을 모색하는 이중의 장르적 기능을 한다. 그렇다면, 퀴어영화 감독으로서 차용하는 멜로드라마의 구조란 어떤 특별한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파 프롬 헤븐>에서 나는 분명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코드를 보조적인 역할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화를 보고 현대 여성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을 새로이 조명하고자 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전작에서 느낀 강한 메시지를 볼 수 없었다면, 바로 더글러스 서크가 그려냈던 여성멜로드라마의 틀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섹슈얼리티 편견의 심각성을 인종문제로 치환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혹시 당신은 좀더 넓은 사회문제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인가. 당신이 말하는 사회문제를 다루고자 했다면 좀더 그런 내용들을 부각시켜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이슈화되는 문제(성 정체성과 인종차별의 문제)는 캐시의 이야기를 보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계속 당신을 퀴어영화 감독으로 규정하는 건 옳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당신은 확실히 더 넓어진 시야를 갖게 된 것 같은데…. 우리가 이 영화를 통해 당신의 어떤 의견에 가장 귀기울이기를 바라는가. 이젠 좀더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편하게 말하는 방법을 아는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는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마, 섹슈얼리티나 다른 사회문제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다가갔다면 전체적인 영화의 톤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캐시의 이야기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다.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를 재창조한다는 것은, 바로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준비 중인 당신의 영화 <West Memphis Three>는 어떤 영화인가? 설명을 부탁한다. 차기작 <West Memphis Three>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오랜 기간 시나리오 수정작업을 하였다. 지금은 초반작업 중이며 한국 관객에게 보여지길 바란다. 글 정한석 [email protected]
퀴어 시네마(queer cinema) : 동성애를 중심으로 성정체성 문제를 심도있게 다룬 영화의 한 경향.- <영화용어사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