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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 헤딩은 이제 그만!
2001-05-09

공인회계사 임호천

“영화산업의 발전은 투명성에서 옵니다.” 공인회계사 임호천,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화 ‘제작회계사’(Production accountant) 임호천. 명필름, 튜브엔터테인먼트,

KM컬처, 코리아픽처스 등 국내 굵직굵직한 영화사와 투자사들의 회계업무를 맡고 있는 그는 “투자자는 제작자를 못 믿고 제작자는 투자자를

못 믿는 영화시장”이 발전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 중 하나를 ‘투명성’으로 꼽았다. “제작비를 어디서, 누가, 무엇 때문에, 얼마만큼

썼는지, 관객이 얼마만큼 들어서, 얼마를 벌고, 얼마를 남겼는지 모르니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 모든 것을 객관적인 자료로 남기고 관리하는

것. 이게 바로 제작사와 투자자들간의 불신을 깨고 서로를 믿게 하는 초석입니다. 그게 제가 하는 일이고요.”

“저, 사실은 영화를 전혀 안 좋아하던 사람이었어요.” 한 회계법인에서 회계사로 일하던 임호천씨를 영화판으로 불러들인 건 김승범씨였다. 회계사가 되기 전 3년 동안 일신창투에서 심사역 일을 할

때 만났던 김승범씨는 당시 일신창투가 영화투자를 시작하면서 회계업무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임호천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영화계의

첫 경험은 큰 시행착오와 뼈아픈 교훈을 낳았다. “몇억 필요하다, 하면 그게 어디에 필요한지도 모르고 내줘야 하는 형편이었죠.” 촬영할

때는 제작비가 초과되어도 투자자가 어떠한 컨트롤도 할 수 없었고, 흥행성적이 좋았지만 영화의 개봉이익이 전부 제작사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강건너 불구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쓴경험을 맛본 뒤 두 사람은 “자금을 대는 사람이 돈의 흐름에 대한 주체가 되어야겠구나.

그러기 위해서 제대로 된 관리, 제작, 회계시스템을 만들어 보자”며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한국영상투자개발’이었다.

지금 충무로에 통용되고 있는 ‘영화제작투자 및 분배에 대한 계약서’ 역시 그 시절 두 사람의 작품(?). 그런 합리적인 시스템을 처음 도입한

것이 명필름의 <접속>이었다.

“그간의 충무로 영화제작은

시스템의 체계화 없이 영화사 사장의 ‘오랜 노하우’로 모든 일이 처리되는 식이었죠. 하지만 명필름은 조금 번거러울 수도 있는 시스템을 긍정적이고

능동적으로 받아들였어요.” 다행히 훌륭한 흥행성적표를 내놓은 <접속>은 합리적인 제작시스템에도 후한 점수로 돌아왔다. “이젠

대기업들도 영화를 단순히 자사의 이미지메이킹을 돕는 홍보수단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뛰어들고 있어요.” ‘홍보’가 아닌 ‘산업’으로서

영화가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자료축적에 대한 요구가 시급하다. “제작업무 전반에 대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어요. 영화를 처음 만드는 제작자나

초보투자자도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만드는 거죠. 늘 모든 사람이 개척자가 되어 맨땅에 헤딩할 필요는 없잖아요?”

아직까지 국내에서

영화쪽 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회계사라고 해봐야 겨우 3, 4명. 그러나 요즘엔 전화를 걸어 질문을 해오는 회계사들이 많다. “영화산업이

가지는 특이한 회계처리들이 많거든요. 점점 영화제작에서 회계업무의 필요성과 특화된 회계사 양성의 요구가 느는 것 같아요.” 물론 영화가

다른 산업에 비하면 “돈되는 비즈니스”는 아니지만 “한국영화를 산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일조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틴다는 임호천씨. “사실은,

다른 일보다 더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예요. (웃음)이제는 영화가 재미있더라구요.”

글 백은하 기자 사진 오계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