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mm의 산전수전
지루하다. 뭔지 모를 12개의 입방체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렇다고 색깔이 강렬한 것도 아니다. 자세히 보니 입방체가 하나씩, 둘씩 움직인다. 팸플릿에 소개된 러닝타임은 12분. 설마 12분 동안 입방체가 조금씩 움직이는 모양새만 바라보라는 건 아닐 테지. 그러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린 채 영상은 성실하고 꾸준하게 비슷한 운동을 반복한다.
솔직히 말하면 김재관의 <삼차원 입방체의 비의성(秘意性)-그 회화적 해석>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이 주최한 특별전 ‘미술 속의 만화, 만화 속의 미술’에 소개된 11편의 애니메이션 가운데 가장 재미없는 작품에 속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일까.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작품이 울림을 준 이유는….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추상적인 입방체들이 일정하게 운동하다가 여러 개로 분열하고 서로 겹치기도 하는 영상은 충격적이지 않다. 재미도, 서사구조도 없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있다. 바로 소리다.
처음에 들리는 것은 이상한 나라 말로 염불을 외는 듯한 소리. 중세 수도사가 신을 숭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밀교의 기도문 같기도 하다. 꽤 오랫동안 의미 모를 소리가 들리는 듯했는데 정신차려 보니 다른 소리가 들린다. 입방체들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지는 건 파도소리, 바람소리다.
그러고보니 소리에 따라 입방체들이 운동하는 게 아닌가. 이제 소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파리가 날아다니는 소리, 화장실에서 오줌누는 소리, 물 내리는 소리도 들린다. 창 밖에서는 사이렌이 울리고 화장실을 다녀온 누군가가 물을 따라 마신다. 뭔지 모를 소리와 함께 운동을 시작한 삼차원의 입방체들은 이제 일상을 말하고 있다. 불도 나고, 바람도 불고, 산전수전이 다 지나간 듯하다.
오호라, 발견했다. 울림의 정체. 저 12개의 입방체는 마치 우리 인생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조금씩 변한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1초 전과 지금은 다르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밥을 먹고 배설하고…. 1초 전과 지금이 다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전체가 움직이고 부분이 움직이고 그러다가 다시 전체가 된다.
작가 김재관은 화가에서 출발해서 지금도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47년생의 중견작가는 ‘움직임이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고민을 3D애니메이션으로 실험했다. <삼차원 입방체의 비의성(秘意性)-그 회화적 해석>은 ‘액자 속 그림이 움직인다면 어떨까?’ 하는 발상을 했던 수많은 작가들의 상상을 실현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중성과 서사구조를 담보한 작품을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애니메이션’이라고 규정한다면, 그의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 회화 작업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 작가는 그저 회화와 움직임을 결합하는 것에 치중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을까? 인생에는 클라이맥스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재미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저 12개의 입방체들처럼 자기 내부의 질서도, 세상의 질서도 덤덤하게 조금씩 변해간다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정답은 제목 그대로 ‘숨겨진 의미’(秘意)가 아닐까.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미술 속의 만화, 만화 속의 미술’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6월30일까지(http://museum.ewha.ac.kr/).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