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유럽연합(EU) 대표부와 한국 시네마테크협의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유럽연합영화제’가 오는 5월10일부터 17일까지 8일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한국-유럽연합간 공식 외교수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이번 영화제는 총 15개의 유럽연합 회원국들 가운데 포르투갈과 룩셈부르크를 제외하고 13개국의 13개 작품을 선보인다.
현재 한국에서 상영되는 전체 영화들 가운데 유럽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EU영화제는 그동안 접하기 힘들었던 유럽 각국의 영화들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영화제 상영작들은 통일된 컨셉을 기준으로 선정된 것이 아니라 유럽연합의 각 회원국들이 자국에서 최근 상영된 대중영화 가운데 뽑은 한편씩을 모았다. 이번 영화제의 상영작들이 유럽연합 각 회원국들의 뚜렷한 개별성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국적을 가진 작품들이 모였다는 측면에서, 개봉작들이 크게 할리우드영화와 한국영화로 양분되는 현실에 익숙한 요즘 관객에게 이번 영화제는 단순히 ‘낯선 외국어들의 영화제’ 이상의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겠다.
그리스
<꺼져가는 불빛> 바실리스 두로스 Vassilis Douros/ 2000년/ 95분
바이올린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12살 소년의 따뜻한 성장 이야기. 엄마와 단둘이 사는 크리스토스는 희귀한 눈병을 앓고 있어 온전한 시력으로 세상을 볼 수 없다. 친한 친구와 다름없는 등대지기 할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 켜는 법을 배운 아이는 그러나, 엄마의 반대로 바이올린 연주도 마음껏 할 수 없다. 종종 흐르는 바이올린 단선율과 아름다운 아테네의 해변 풍경이 이 영화의 잔잔한 분위기를 이끈다.
네덜란드
<천국의 발견> 여룬 크라버 Jeroen Krabbe(e에 악상떼귀)/ 2001년/ 127분
인간에게 실망한 신은 오래 전에 선물로 내렸던 십계명을 도로 찾아오도록 명한다. 이 임무를 부여받은 젊은 천사는 직접 내려가는 대신 지상의 몇몇 인간을 조종하여 일을 완수하려 하지만, 인간이 지닌 고유 의지가 일을 꼬이게 한다. 네덜란드 영화사상 최대 제작비가 들었고 개봉 당시 첫 주말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네덜란드에서 현존하는 주요한 작가 중 하나인 해리 멀리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덴마크
<키라의 사연> 올레 크리스티앙 Ole(e에 악상떼귀) Christian Madsen/ 2001년/ 92분
30대의 아름다운 여성 키라는, 준수한 외모에 건축가로 성공한 남편과 어리고 예쁜 두 아들을 둔 중산층 주부다. 정신질환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던 그는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퇴원했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엉뚱한 행동들로 문제를 일으킨다. 남편은 그런 부인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결국 결혼생활은 파경의 위기에 이른다. 도그마95 선언이 아직 유효한 덴마크 작품.
독일
<폭력의 종말> 빔 벤더스 Wim Wenders/ 1997년/ 122분
1997년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 할리우드 프로듀서 맥스는 잔인하고 피투성이의 액션영화들로 부와 권력을 얻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무심함을 못 이겨 그를 떠나고자 결심한다. 어느 날 맥스는 치한들에게 납치당하고 실종신고를 접수한 경찰이 조사에 나선다. 다른 한편에서는 십수개의 모니터를 통해 LA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시하는 베링이란 인물이 이 상황을 관찰한다. 그는 특히 폭력이 발생하는 순간을 주시하며 뭔가 미심쩍은 구석을 남긴 맥스의 납치 사건에 관심을 보인다. 미스터리 구조를 띠는 이 영화는 후반부에서 의외의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하지만, 시종 어두운 화면과 느린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졌다. 영화에 출연한 미국 배우들의 영어 대사는 독일어로 더빙됐다.
벨기에
<캐리어스 웨이팅> 브느와 마리아즈 Benoit Mariage/ 1999년/ 94분
지방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진사 로제는, 재주없는 평범한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남들보다 좋은 기록을 가지는 것이라고 믿으며 가족들에게 이러한 가치관을 강요하는 아버지이다. 기록대회에 늘 관심이 쏠려 있는 그는 어느 날 자동차를 1등 상품으로 내건 ‘문 열고 닫기 챔피언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들 미셸을 내보내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집에 마지못해 순종하는 아들을 코치까지 초빙해와 훈련시킨다.
흑백필름으로 촬영됐고, 프랑스 개봉 당시 완벽주의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로제 역의 브누아 보엘부르드의 연기가 현지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신문사 사진기자 출신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주로 해온 마리아즈 감독의 장편극영화 데뷔작이다. 경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간결하고 사실적인 느낌을 강하게 전달하면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유머와 공허한 가치를 무의미하게 추구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조화롭게 담았다.
이탈리아
<직업군인> 에르만노 올미 Ermanno Olmi/ 2000년/ 110분
2001년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 1526년 북이탈리아에서 어두운 중세가 끝나고 도래한 정치적인 혼돈의 시대를 배경으로, 이 영화는 독일 황제 카를5세의 군대에 맞서 싸운 젊은 장군 지오반니 디 메디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2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 부대를 이끄는 대장 지위에 오른 그는 놀라운 전투 실력의 소유자로서 모든 이들에게 살아 있는 전설로 대접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중세의 전쟁 기술도 화기의 발명 앞에 더이상 쓸모없어지고 만다.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물, 혹은 전쟁물이라기보다 좀더 고상하고 박식하게 캐릭터를 탐구해가는 영화다. 많은 언론은 이 영화가 78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더 트리 오브 우든 클록스>(The Tree of Wooden Clogs) 이래 올미 감독 최고의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스페인
<루시아와 섹스> 훌리오 메뎀 Julio Medem/ 2000년/ 128분
마드리드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루시아는 남자친구이자 소설가인 로렌조의 죽음을 전화로 접한다. 슬픔을 안고 그와 함께 지냈던 지중해의 외딴섬을 찾아가 과거를 회상하는 그는 그곳에서 로렌조가 과거에 썼던 하룻밤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우연히 읽게 되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 과거의 사실들에 충격과 혼란을 경험한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과거 회상과 현재의 교차편집장면들과 포르노그라피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섹스신들이 인상적이다. 스페인의 아카데미로 불리는 스페인 고야영화제에서 신인여우, 오리지널 스코어, 촬영, 편집, 감독, 작품, 남우주연, 각본, 여우조연 부문에 노미네이션 됐고 이중에서 신인여우상과 오리지널 스코어상을 수상했다.
영국
<레이닝 스톤> 켄 로치 Ken Loach/ 1993년/ 93분
93년 칸 심사위원대상 수상 및 경쟁부문 출품작. 감독 켄 로치는 50년대 영국 프리시네마 기수로서 현재까지 활동 중인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상영작들 가운데 가장 오래 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가족과 종교에 헌신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난하지만 자존심 센 밥은 생에 첫 영성체를 받는 딸에게 아름답고 비싼 옷을 무리해서 장만해주려고 하다가 어려움에 부닥치고,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더욱더 불가능한 수단들이 동원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황량하고 칙칙한 영국 노동계급의 삶이 다큐멘터리적인 꼼꼼함으로 묘사된 영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마음에 울림을 준다.
스웨덴
<생일> 리처드 호베르트 Richard Hobert/ 2000년/ 114분
미카엘은 50번째 생일 파티를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것으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친척과 친구들을 초대한다. 이 파티에서 약혼녀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던 미카엘과 달리, 약혼녀 캐티는 생일파티가 끝나자마자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유독 흥미로운 점은, 감독인 리처드 호베르트가 자신의 전작 6편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을 미카엘의 친구들로 등장시켜 파티에 불러모으는 설정이다. 전작이 소개되지 않은 국내 관객에겐 물론 흥미가 느껴지지 않겠지만, 여러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와 이 영화의 따뜻한 분위기만 즐겨도 괜찮을 작품이다.
오스트리아
<이방인> 괴츠 스필만 Gotz Spielmann(o위에 점 두개)/ 2000년/ 102분
1kg의 코카인을 비엔나 공항에서 밀수하려는 젊은 연인 레이너와 메르세데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지방 마약단속 때문에 완전히 좌절되고, 메르세데스는 마약을 빼앗아 도망친다. 택시 운전사 해리와 우연히 만난 그녀는 자신이 고향인 멕시코로 돌아가려면 이 마약을 꼭 팔아야 한다며, 마약 구매자를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사정한다. 비주얼과 음악이 인상적인 영화.
프랑스
<파르바의 전설> 장 퀴보 Jean CuBaud/ 2002년/ 85분/ 애니메이션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출, 주연을 맡았던 이탈리아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와 <피노키오>의 작가 빈센조 세라미가 각본을 쓴 프랑스 애니메이션. 유성이 지구에 부딪히던 날 태어난 여자아이 파르바는 어려서부터 마법의 힘을 보인다. 10살 때 엄마를 잃은 그는 우연히 길에서 발견하고 집에 데려온 강아지를 통해 신비로운 모험을 겪게 된다.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한동안 제작이 뜸했던 프랑스 애니메이션이 올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나온 작품. 단순한 그림체가 썩 곱고 예쁘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5월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기에 적합하다.
아일랜드
<야간 열차> 존 린치 John Lynch/ 1999년/ 92분
주인공 풀은 잘못된 책을 조작한 혐의로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다. 자신에게 복수하려고 벼르는 갱스터 빌리를 피하기 위해 더블린의 민박집에 숨어 지내기로 한 그는, 민박집 주인의 딸인 앨리스와 사랑에 빠진다. 한편 풀은 어린 시절 장난감 기차에 심하게 집착했던 강박증의 기억을 갖고 있다. 그에게는 그런 기차를 실제로 타고 여행해보는 것이 그 시절 접어버린 꿈. 착한 주인공들이 몽상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그 꿈을 쫓아가는 이야기가 사랑스럽다.
핀란드
<헬싱키의 하늘 위로> 페에테르 린드홈 Peter Lindholm/ 2001년/ 90분
주인공 리쿠는 자동차 사고로 형 다니를 잃는다. 리쿠의 아버지 헨릭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유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사업까지 넘겨받으면서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 헨릭은 두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싶어하지만 록스타가 되길 꿈꿨던 다니는 이미 죽었고, 형보다 관심을 덜 받으며 자란 리쿠는 그 불만의 반작용으로 ‘어두운 사업’에 손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헨릭의 회사까지 위협한다. 아버지 헨릭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탁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