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보다 훨씬 늦게 나타난 친구가 별 미안함도 보이지 않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있다가 느닷없이 “산다는 건 어쩌면 이 악물고 악착같이 버티는 견딤의 또 다른 말일 것”이라는 푸념을 한다. 고백 같은 어투였지만 한편으로는 초월적이고도 진중한 성찰의 소리 같아 좀 당황스럽기까지 했으나 그 진의와는 관계없이 상업적인 내 머리는 친구의 그런 태도나 말들이 술값을 피해보려는 얄팍한 트릭일 가능성이 크다는 쪽으로 결론내리고 곧장 대응에 나섰다(우리는 친구를 만남에 있어서도 이렇듯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세상의 불화를 부축여 먹고사는 놈답지 않게 왜 일부러 진지하려고 노력하느냐? 예전처럼 안 벌여서 그러면 꼭 목돈만이 돈 아니다! 아쉬운 대로 수임료를 24개월 무이자로 받는 파격 영업을 해라!” 그러는데도 별 반응없이 술만 붓고 있는 놈의 행태가 기이해 이건 아니다 싶어 정공으로 치고 들어갔다. “누구한테 돈 뜯겼느냐, 그랬으면 네 말마따나 이 악물고 악착같이 버티는 것을 삶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본때를…” 하는 대목에서 울컥한 그의 반응이 나왔는데 그것은 느닷없기는 하되 나한테는 전혀 충격스럽지 않은 케케묵은 <조선일보>에 관한 히스테리였다. 여기서 말리면 밤새게 된다는 절박함에 화제를 돌리느라 “세상 좋아지면 그런 것들이 어디서 꼼지락거리라도 하겠냐?”는 말을 던졌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야 세상이 어떻게 좋아지냐?… 어떻게 좋아지냐고, 세상이! <조선일보>가 뒤에서 떡허니 버티고 있는데! 내가 말한 사는 게 견딘다라는 건 <조선일보>나 <조선일보> 닮은 너같은 새끼들 하고 직간접으로라도 부딪치고 살아야 하는 그 비애를 말하는 거야, 미련한 놈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 하며 포문을 연다.
분명 뻔하다. 전작이 있었겠지! 그러다 <조선일보>나 <한겨레>가 안주로 올라왔겠고! 나쁜 애들하고 원래 잘 안 노는 친구니까 그 자리가 <조선일보> 칭찬하는 자리는 아니었을 텐데 화가 난 걸 보면 아마 직업 특성상 편향된 사고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양비론이라도 펴서 논리의 균형을 대충이라도 맞추려 애쓰는 동종업자들에게 열불이 났겠지,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겠고, 그러다 걸려든 게 만만한 나고…. <조선일보>를 말함에 있어 사고의 균형을 잃은 무능한 법률가로 만천하에 낙인찍힌다 해도 더러운 이모씨 식의 물타기는 사양하겠노라는 대목에서 이 술자리의 앞길은 정해졌다.
아, 그 친구! 일제부터 거슬러올라가려 해서 <조선일보>의 친일행적 충분히 알고 있다고 했더니 1985년 2월 12대 총선 때의 신문보도를 가지고 나를 들볶는데…. 사실 나도 12대 총선 하면 이가 갈리는 사람이다. 내가 보병으로 전방에서 뺑이치고 있을 땐데 김대중이 총선을 겨냥해 미국에서 들어온다며 근 한달 동안 군인들 잠 안 재우고 이념교육 시키는데 오죽했으면 필리핀의 아키노 꼴 나지 말고 그냥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발표를 다 했을까? 그제야 잠을 허락받고 교육실을 나서는데 뒤통수에 박히는 그 따가운 눈초리를 생각하면…. 이 또한 나로서는 상처라면 상처고 감추고 싶은 비밀이라면 비밀인데….
내가 <조선일보>를 실로 같잖고 가소롭고 천박하게 보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옛 군사정권 시절, <서울신문>이 관제언론을 할 때 그들은 두손 번쩍 들고 “나 걸레요!”하고 고백하고 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군부에 갖은 아양과 교태를 부리며 치마를 들썩거려 그 더러운 욕정을 드러내면서도 돌아서면 고상하고 단아한 정절의 화신인 양 행세하며 순진무구한 사람들을 현혹했기 때문이다. 차 떠나자 손 흔든다고, 수많은 언론인들이 해직, 수배, 구금, 구속을 무릅쓰고 쟁취해놓은 작금의 자유 앞에서 정의와 언론자유의 깃발을 얼른 뺏어들고 힘차게 내젓는 그들의 변신이 나를 결심하게 만든다. “쪽팔림은 순간, 저래야 산다! 누구 말마따나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게 아니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저 조선의 강함을 온몸을 던져 그 영혼까지 받아들여야겠다.” 친일, 반민족, 반민주, 반민중 거기다 국민의 안위가 걸린 안보마저 이용하는 그 처절한 상업주의, 수구 반동 세력들의 앵무새, 그들이 저지른 패악이 어찌 이것뿐이랴! 집단적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조선일보>의 팀장이라는 사람이 모 방송사 토론에 나와 문광부 내부홍보업무 운영방안에 관해 결사반대를 외치며 언론의 비판기능과 국민의 알권리, 그것도 모자라 기자윤리까지 들먹일때, 그러면서 타 신문사의 경품제공의 예를 들며 자신들의 상대적 무고를 강변할 때 나는 정말이지 물타기의 정점을 봤다. 야당투사에서 신한국당으로 변신했던 한나라당 이규택과 조중동이 나란히 손잡고 작당하여 독버섯이라고까지 비하했던 이창동은 살아온 삶의 이력과 족적을 보더라도 그렇게 불리거나 함부로 씹혀야 되는 사람이 아니다(여기에 대해 할말은 많지만 동종업 종사자라 두둔한다는 트집을 잡힐까봐 말을 생략하지만…) 개인을 망라한 모든 문명사적 발전과 진보의 예단은 성찰과 반성, 그리고 눈물서린 자기고백에 있다. 그것없이 역사는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 밤새 나를 들볶았던 내 친구와 내가 보고 싶은 것이 바로 <조선일보>의 반성과 눈물이다. 제발 한번만이라도 울어주라! 상관없다, 그것이 악어의 눈물일지라도….김해곤/ <파이란> <블루> 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