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어느 클럽 앞에서 요란한 사이렌이 울린다. 한 남자가 들것에 실려나오고 다른 사람은 손목에 수갑을 찬 상태다. 그들은 알렉스(모니카 벨루치)라는 여성의 연인 마르쿠스(뱅상 카셀)와 옛 연인 피에르(알베르 두퐁텔)다. 장면이 바뀌면 시간은 과거로 흘러간다. 알렉스를 다치게 한 사람을 찾아 마르쿠스와 피에르는 밤거리를 미친 듯 방황한다. 그들은 중국인 택시기사와 시비가 붙기도 한다. 마르쿠스와 피에르는 복수를 다짐하고 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오르면 이번엔 알렉스가 지하보도를 걸어가고 있다. 그녀는 연인과 크게 다툰 뒤 혼자서 길을 걷는 중이다. 알렉스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한 남자에게 붙들려 강간을 당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과거로 흐르고 마르쿠스와 알렉스는 침실에서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 Review
누군가 물었다. “1. 예술영화 2. 자극적이고 컬트적인 기운이 있다. 3. 뭔가 확 치밀어오르게 한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영화 없을까?” 난 아무런 주저없이 답했다. “<돌이킬 수 없는>을 봐요.” <돌이킬 수 없는>은, 추문(醜聞)의 영화다. 2002년 칸영화제 상영 당시 관객은 줄지어 상영관을 떠났으며 영화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하드코어 포르노’ 논쟁을 낳기도 했다. 폭력과 섹스장면이 극영화의 한계점을 넘어선 것 아니냐는 내용의 논쟁이다. 틀린 지적은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은 눈뜨고 보기 힘든 장면이 적지 않다. 분노한 누군가 사람의 머리통을 부숴놓고, 밤거리를 혼자 걷던 여성은 성추행을 당한다. 클럽에선 동성애를 하는 이들의 끈적한 신음소리가 흘러넘친다. 누군가는 근친상간의 경험을 고백한다. “너무 폭력적이고 잔인해서 많은 이들이 참고 보기 힘든 영화”라는 어느 비평가의 언급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영화에서 배어나오는 땀냄새와 기괴한 에너지, 그리고 광기는 스크린 밖으로 뿜어져나와 배회한다. 그것에 전염되지 않고 버티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돌이킬 수 없는>의 시작은 마약 같다. 카메라는 고정되지 않은 채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우리는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남자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특정한 장소를 찾아 헤매고,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 누군가의 이름을 끝도 없이 중얼거린다. 클럽에 들어간 남자들은 이름을 호명하고 다니고, 다른 패거리와 시비가 붙는다. 카메라는 여전히 허공에서 정지할 줄 모른 채 휘휘 돌아다닌다. 피사체를 찍기 위해 카메라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버린 듯하다. 춤도 추고 공중을 날아다닌다. 카메라 스스로가 마약에 중독된 것 같다. 우리는 때로 카메라가 무엇을 찍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아니, 찍을 의도가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게다가 반복적인 소음이 들려온다. 그것은 멈출 듯 멈추지 않고, 저주처럼 계속된다. <돌이킬 수 없는>의 초반부는 주술적이다. 술취한 이의 의식 속으로 들어간 듯 영화는 몽롱한 리듬감을 형성하면서 보는 이의 이목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영화는 거꾸로 서 있다. 이야기가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간다는 의미다. 이것만으로는 <박하사탕>을 봤던 우리로선, 신선한 체험이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박하사탕>이 순수했던 그때, 순수의 영혼을 갈망하는 영화라면 <돌이킬 수 없는>은 위악적 기운이 역력하다. 성적 모독과 인종차별, 근친상간에서 폭력까지 위악적 부분만을 세밀하게 골라낸 것 같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연상하면 좋겠다. 멀쩡하던 육신을 짓이겨놓고 육체라는 질곡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말이다. 사실 <돌이킬 수 없는>의 서사는 그것이 역순이라는 점을 논외로 하면 빈약한 편이다. 강간당한 연인을 위해 복수하는 남성의 이야기인 것이다. 진부하다. B급 스릴러영화와 다르지 않다. 고루한 이야기를 장난스럽게 거꾸로 배열하면서 영화는 한 가지 비장의 카드를 놓치지 않는다. 이 장면은 놓치지 마세요, 라는 식이다. 알렉스 역의 모니카 벨루치가 밤거리에서 강간당하는 장면이 그것. 지루할 정도로, 그리고 혐오감이 배어날 정도로 10여분간 길게 진행되는 이 시퀀스는 <돌이킬 수 없는>을 ‘잊을 수 없는’ 영화가 되도록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을 품게 한다. 이전까지 정신나간 듯 춤추던 카메라가 왜 여기선 고정된 채 부동자세를 취할까? 괴성을 지르며 저항하는 여성의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속할까? 영화 <돌이킬 수 없는>에 대한 미학적 판단이 갈릴 수 있는 지점이다.
영화는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되면서 알렉스, 마르쿠스, 피에르, 세 사람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다가간다.
파티장으로 향하는 세 사람은 즐거운 표정을 숨길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은 이미 그들이 어떤 비극에 처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다.
<돌이킬 수 없는>에 대해 짧게 코멘트하자면 이 표현은 어떨지. “천재적이거나 혹은 천재이길 애타게 갈망하는 영화”라고. 과잉과 극단으로 똘똘 뭉친 영화는 구조적으로 나무랄 데 없다. 영화는 ‘편집’의 개념을 무력화한 사례다. ‘원신 원컷’, 다시 말해 각 시퀀스를 한 호흡으로 길게 찍었다는 의미다. 약간의 특수효과를 제외하면 시각적으로 분명 그렇게 구성된다. <돌이킬 수 없는>의 촬영은(감독 가스파 노에가 직접 촬영까지 했다) 정밀하고 철저히 계산적이다. 배우의 동선과 캐릭터들의 심리, 이미지의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방식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역전된 서사와 이미지 과잉, 그리고 구조적 완벽함이 공존하는 것. <돌이킬 수 없는>은 영화가 단순하게 ‘누군가 이렇게 살고 사랑했었네. 그리고 또 행복하였네’를 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극단의 실험이 가능한 매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돌이킬 수 없는>은 근친상간의 주제를 각인시킨 <아이 스탠드 얼론>(1998)으로 칸영화제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가스파 노에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가스파 노에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에서 오시마 나기사, 그리고 샘 페킨파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영화사적 지식을 동원한, 그리고 저널의 논쟁을 정조준하고 있는 문제작을 만들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