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노력없이 얻어지는 일들에 대해 신경증에 가까운 회의를 품었다. 건축가인 아버지 밑에서 캔버스를 장난감 삼아 자라던 어린 시절엔 나타나지 않았던 증세였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녀의 의심하는 버릇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서클을 결정할 때면 친구들이 먼저 “넌 역시 미술부” 하고 물어올 정도로 다른 취미를 보이지 않던 그녀가 ‘반골’기질을 내비친 건 정확히 미션스쿨이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성경공부를 위한 미팅에서, 당시 사립고교에서 공공연히 일어났던 교사해직사건에 대해 지도교사였던 대학생 선배들이 들려준 얘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필터가 되었다. 교사를 노동자로 인정해주지 않고, 따라서 그들의 권리가 묵살되고 있는 방증이며, 참교육을 위해서는 학생과 선생의 교육권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의식화 과정을 통해, 이른바 ‘참교육 세대’였던 그녀는 가장 예민했던 소녀 시절의 한 갈피를 치열한 고민과 자기 투쟁으로 고통스럽게 넘기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며 그녀는 조금 가벼워지고 싶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며, 그룹사운드 활동을 택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
<쇼쇼쇼>는 그녀의 ‘입봉작’말하자면 정식 데뷔작이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음반회사인 킹 레코드사에 입사해 1년을 회사원으로 살았다. 컴퓨터그래픽 실력과 그룹사운드에서 키보디스트와 세션맨으로 활동한 것을 밑천 삼아 음반광고 제작, 재킷과 부클릿 디자인을 하면서 착실히 커리어를 쌓을 때였다. 시계초침 같은 회사생활이 맞지 않는다고 느껴 프리를 선언한 뒤 핑클, 젝키스트, 임창정 등의 앨범 디자인을 하다 불현듯 그녀는 영화기획사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음반회사 입사는 기실 그녀가 바란 것이었지만 너무 쉽게 얻은 자리 같다는 의문을 지우지 못했고, 조여진 생활에 대한 그리움도 한몫했다. 그러나 그녀를 돌려세운 건 ‘힘든 노동을 통한 정당한(어쩌면 짠) 대가’에 대한 강박관념이었는지도 모른다. 2000년 <해변으로 가다>의 미술팀에 합류하면서 그녀가 원하는 힘든 노동과 짠 대가를 모두 얻었다.
<번지점프를 하다> <킬러들의 수다> <와니와 준하>를 거쳐 <쇼쇼쇼>에 이르면서 그녀는 “너무 사랑했기에 상처받았다”고 말한다. 입봉작, 심정적으로 첫 작품이었던 <쇼쇼쇼>에 그녀는 “목숨을 걸었다”고까지 했다. 그녀가 상처받은 것은, 기쁜 노동과 기쁜 대가에 대해 비로소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그녀가 현장에서 ‘똥고집’이라고 불린 건, 명칭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는 자세와 미술팀의 위상을 정상화(알겠지만 頂上이 아닌)시키기 위한 ‘싸움’ 때문이었다. 그녀는 싸웠다. 무던히도. 그리고 그녀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덕분에 촬영 제일, 조명 으뜸의 현장이 아닌 ‘확실히 볼거리 있는 영화를 만들 거면 미술팀과 상의하라’던 그녀의 고집이 통한 현장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떠오르는 이름 가운데, ‘프로덕션 디자이너’ 정영순은 그래서 아픈 심장이 조금 낫는 듯했다. 글 심지현 [email protected]·사진 조석환 [email protected]
프로필
→ 1974년생→ 97년 킹 레코드사 입사→ 98년 핑클, 젝키스트, 임창정 앨범 디자인→ 99년 <신혼여행> 기획실과 디자인 팀장으로 활동→ 2000년 <해변으로 가다> 미술팀 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