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자본, ‘적과의 동침’
자본과 예술의 동거가 불가피하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이 곧 양자가 행복하게 병존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상업적 이윤과 예술적 가치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일이 대중문화 산업의 궁극적 화두인 동시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딜레마라는 게 주지의 사실이고 보면, 그 속에서 최종편집권을 둘러싼 영화사와 감독의 마찰이나 앨범 수록곡 선정 여부로 대립하는 음반사와 뮤지션 사이의 갈등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적과의 동침’인 셈이다.
‘섬 41’(Sum 41)의 싱글 <Still Waiting>의 비디오는 음악산업의 이면에서 그처럼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는 근본적인 갈등에 대한 자기 패러디의 시트콤이다. 그 구성은 크게 두 부분- 섬 41의 멤버들과 레코드회사(정확히는 ‘아일랜드 레코드’)의 (고위간부로 보이는) 직원의 미팅장면을 담은 에피소드와 60, 70년대에 유행했던 버라이어티 쇼풍 세트 앞에서의 연주 모습으로 나뉘는데, 골자를 담고 있는 전반부의 희화화된 에피소드는 자본과 예술의 양립이 영원히 불가능하리라는 비관적 전망과 다름 아니다.
1분 남짓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꽤 여러 가지 얘깃거리들을 펼쳐놓고 있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지극히 단순 명료하다. “새 앨범을 들어보았느냐”는 멤버들의 질문에 “들어보진 않았지만 어련히 잘 만들지 않았느냐”고 답하는 간부직원 사이의 첫 번째 대화에서부터 뮤지션과 레코드 회사의 동상이몽을 확연히 드러내놓고 있는 게 그 증거이다.
결코 화해하지 못할 그들 사이의 입장차이는 밴드 이름을 바꾸자는 간부직원의 강압적 제의를 통해서 좀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이제 ‘블링크 182’나 ‘그린 데이 75’처럼 숫자가 붙은 이름은 한물갔다”고 주장하며 “요즘은 ‘스트로크스’, ‘바인스’, ‘하이브스’,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같은 이름이 대세”라고 덧붙인 뒤, 앞으로 밴드 이름을 ‘섬 41’이 아니라 ‘섬스’(Sums)라고 부르자고 결정해버린다(그는 심지어 밴드 멤버 개인의 이름까지도 바꿔버린다).
우스꽝스럽게 연출된 이 장면은, 실제 밴드 이름들을 거론하며, 팝 펑크의 유행이 가고 복고풍 로큰롤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최근의 인기 기상도를 그대로 반영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오로지 유행을 좇아 ‘팔리는 음악’을 찍어내는 데만 관심이 있는 레코드회사의 속성을 밴드명이란 매개를 통해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90년대 중반의 팝 펑크 유행을 가져온 원조격 밴드 ‘그린 데이’의 이름을 ‘그린 데이 75’라고 잘못 언급한 부분도 음악에 대한 레코드회사의 무관심과 무지를 비꼬기 위해 밴드가 의도적으로 매설해놓은 교묘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레코드회사에 대한 밴드의 입장과 태도가 드러나는 것은 음악이 시작되는 다음 장면부터이다. ‘섬스’란 거대한 글자를 세워놓은 무대 앞에 등장한 밴드가 연주의 말미에 그 세트를 엉망진창으로 박살내고 마는데, 그것은 곧 로큰롤의 생래적 특성이라 간주되는 반항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의 반영으로서 의미 획득을 암시하는 결말인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록시대의 개막 이래 단 한번도 바뀐 적이 없는 ‘예정된’ 라스트신의 통속적 변주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비디오는 자칫, 상업주의와 타협하지 않는 순수성의 과시를 클리셰로 삼는, 자기 패러디를 불사하는 것을 ‘쿨’한 면모로 판매하는 시대의 산물로 의심받을 여지가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온갖 센세이셔널한 시도가 판을 치는 이 물질적인 시대의 미덕은 레코드회사로 하여금 ‘욕을 얻어먹는 한이 있어도 앨범만 많이 팔면 그만이다’라는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해주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비디오 속에서 그들의 이름이 어떻게 뒤바뀌건 간에 MTV는 이 비디오가 결국 ‘섬 41’의 것이라는 사실을 자막으로 알려주고 말 거란 사실도 분명하니까.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