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반드시 죽게 되는 불치병이라고 했던가. 죽음에 항거하여 존재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 중 하나가 사진을 찍는 행위다. 이름을 짓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만, 사진을 찍는 행위는 좀더 특별하다. 불안정한 에너지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인간을 작은 프레임 안에 가둠으로써 에너지의 움직임을 정지시키고 또한 안정되게 한다. 생물이 사물화하는 순간이다. 죽음이 아니지만 죽음과 흡사한 과정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는 사진찍기는 윤형문(38)에게 신비한 매력을 넘어 엄숙한 소명으로 다가왔다. 특히 그를 매료시킨 것은 로버트 메플도프의 초상사진이었다. 흑인 남성의 육체를 조형화하는 한편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된 아니마(남성성)와 아니무스(여성성)의 성적 억압을 표출하는 신체사진과 초상화는 그의 사진개념을 뒤바꿔놓았다. 인물사진 안에서 동적인 기운을 제거하고, 화려한 배경과 카메라의 기교를 극도로 제한한 초상사진은, 그러나 그 인물의 내면세계를 나타내는 데 가장 적합했다. 인물을 가까이 지켜보는 게 전공인 그가 그려내는 영화 포스터는 그래서 흥미롭다.
우선 그의 포스터는 허리 아래를 넘지 않는 주인공의 상반신이나 극도로 클로즈업된 주인공의 얼굴을 찍은 것이 대부분이다. 배경에는 그리 큰 임팩트를 주지 않는다. 초상사진을 보는 듯하다. 98년 를 시작으로 <인디안 썸머> <동감> <약속> <정사> <진실게임> <와니와 준하> <번지점프를 하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로 이어지는 리스트의 공통점은 멜로영화라는 점, 그리고 위에서 말한 초상사진의 특징을 빼곡히 지녔다는 점. 그래서 다들 조금씩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배우의 이미지만을 의존해 상업적으로 밀고 나간다는 모함이 도처에 도사린다. 동일한 이미지의 생성과 소모, 멜로영화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기본적인 컨셉을 놓고 보자면 멜로영화의 포스터 찍기란 윤형문의 말마따나 ‘쉬워 보이나 갈수록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시나리오가 가져다주는 상황은 다를지언정 한정된 포즈와 배우, 혹은 배경만으로 매번 다른 느낌의 사진을 만드는 것은 이미지의 변주에 따르는 동어반복의 함정을 피하기 힘든 작업이다.
<국화꽃향기>의 포스터에 차용된 함의는 ‘모성애’와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절절함’이다. 그래서 ‘떠날’ 장진영은 ‘남겨질’ 박해일을 보듬어 안으며, 둘은 눈이 내린 기차역에서 마지막 여행을 기약하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작업한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로맨틱함보다는 코믹함을, <하늘정원>은 천국을 연상시키는 꽃밭에 누운 연인의 모습을 통해 반드시 슬프지만은 않은 이별을 예고한다.글 심지현 [email protected]·사진제공 윤형문 포트레이트 스튜디오
프로필
→ 66년생→ 홍익대 산업미술 대학원에서 사진디자인 전공→ 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와 스틸→ <인디안 썸머> <정사>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진실게임> <동감> <약속> <하루> <찍히면 죽는다> <광시곡> <번지점프를 하다> <국화꽃향기> <동갑내기 과외하기> <하늘정원>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