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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통장, 배칠수와 김지하의 가상 3자토론

re: 풍자냐 자살이냐

사회: 오늘은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노 당선자 흉내내기’에 대해 3자토론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KBS ‘봉숭아학당’의 노통장님, MBC ‘3자토론’의 배칠수님, 그리고 특별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김지하 시인 나와계십니다. 그럼 가나다순서에 따라 김지하 시인부터 한말씀 해주시죠.

김지하: 예, 우선 인기 절정의 두 코미디언과 자리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코미디, 그러니까 희극이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개그콘서트> KBS2 일요일 밤 9시

비극이 귀족사회의 산물이라면, 희극은 귀족사회에서 억압당했던 평민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두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통장: 맞습니다, 맞구요. 돌이켜 생각하면 80년대 후반에 <일요일밤의 대행진>이나 <회장님 우리 회장님> 같은 풍자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정치는 절대로 희화화할 수 없는 무거운 존재였습니다. 가벼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시대였지요.

배칠수: 그렇습니다. 80년대 모 탤런트가 전직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출연이 정지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김지하: 그러나 요즘의 정치코미디는 너무 흉내내기에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풍자라는 것과 단순히 명랑하기만 한 해학은 명백히 다른 것이지오. 풍자가 하나의 저항 형식이라면, 목적이 없는 낙천성, 쾌활성은 무해한 골계만을 반복할 뿐입니다.

노통장: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개인기의 시대입니다. 개인기가 없으면 아무리 우스운 이야기도, 아무리 날카로운 풍자도 먹히질 않습니다. 아무도 웃지 않는다면 그것은 풍자도, 코미디도 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배칠수: 김지하 시인은 뭔가 착오를 하고 계십니다. 목적이 있는 코미디만이 좋은 풍자는 아니지요. 러시아의 한 문학연구가가 한 말이 있습니다. “웃음이란 삶 속에 존재하는 관계들과 의미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웃음은 그 자체로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지하: 제가 70년에 <풍자냐 자살이냐>를 썼을 때,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저항의식을 가지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실에 모순이 있을 때, 그것을 돌파하는 도구로서 풍자를 말한 것이었지요. 모순이 있는 한 풍자는 생명력을 가지는 법이고, 모순이 화농하고 있는 한 풍자의 거친 폭력도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법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좋아졌다 해도 사회의 모순마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코미디하우스> MBC 토요일 오후 5시10분

노통장: 김지하 시인이 경험했던 70년대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입니다. 보셔서 알겠지만, 저는 얼마 전 노 당선자와 함께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70, 80년대의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배칠수: 저도 그 글을 읽어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김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암흑시’의 시기 말입니다.

김지하: 저도 두분의 성대모사 자체가 웃음을 자아낸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시대가 변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잘 흉내내는 것, 그러한 심미적 측면만이 중요하겠습니까? 지금처럼 들뜬 시절에 그것은 자칫 사회적 환각제로 타락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노통장: 그런 지적, 인정합니다. 인정하구요. 그렇지만 정치인을 흉내내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닙니다. 지난 5년 동안 김대중 대통령은 가장 인기있는 성대모사 대상이었지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김대중 대통령은 가수 서유석, 최희준과 수평적인 질서 속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차차 권위도 무너져내리는 것이지요.

배칠수: 지금 시인은 떼를 쓰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그 뭐라 그러지요, 패러디, 순수한 패러디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코미디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 이것이 오히려 문제입니다. 정치풍자는 무언가 저항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낡은 코미디의 공식 아니겠습니까?

김지하: 그렇다면 오늘 제가 떼꾼이 되어 떼를 좀 써보겠습니다. 웃음은 그 자체로 의미있다는 지적, 흉내내기를 통해 정치의 권위주의, 엄숙주의가 줄어든다는 지적,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풍자없는 해학은 외치면 외칠수록 공허해지는 법이지요. 그것은 지금도 엄연히 남아 있는 사회적 폭력과 비애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것입니다. 대중도 언제까지나 텅 빈 앵무새 놀이를 환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코미디의 자살행위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선택하십시오. “풍자냐, 자살이냐.”김형진/ 자유기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