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국 감독은 2000년부터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 교수를 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단편영화도 두편 찍었고 새로 나온 디지털 편집기 등 여러 가지 신기술도 익힐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시대감각이 워낙 빨리 변하면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감독이 많았다. 나만 해도 첫 영화를 할 때는 전부 후시녹음으로 찍었다. <편지>만 해도 스텐벡으로 편집했는데 <산책>은 아비드로 편집했고 영화 한편 할 때마다 기술이 달라졌다. 결국 적응하려면 계속 공부해야 된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밀려난다는 생각이 들고 가만 있으면 불안해진다”는 그의 말을 들으면 감독이라는 직업이 다른 분야보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가 니코틴이나 알코올 대신 영화에 중독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한편으론 “젊은 세대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공부한다”면서도 “일과 취미가 같아서 좋다”는 그의 말은 쉽게 낙오될 수 있는 경쟁의 장이지만 그 경쟁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암시한다.
93년에 <부활의 노래>로 데뷔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감독들 가운데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는 감독은 많지 않다. 90년대 한국영화가 급변하면서 나온 결과인데 동세대 감독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 세대까지는 영화공부를 정말 어렵게 했다. 자막도 없고 화질도 나쁜 비디오를 보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과도기적 세대에 낀 게 아닌가 싶다. 요즘 젊은 감독들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습득할 수 있었던 반면 도제시스템이 버티던 시절 영화를 배웠는데 막상 데뷔하고 나니까 그런 시스템이 없어진 거다.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걸 푸념할 순 없다. 적응하는 수밖에. <블루>를 하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감독들이 잘하는 걸, 우리 세대는 못하는 걸로 찍힌 분야를 그래도 어느 정도 했으니까.
과도기적 세대, 맞는 말인 거 같다.
작가주의 이론의 피해도 컸다. 일관된 주제, 스타일, 그런 걸 해야 한다고 너무 진지하게 그것만 생각하다가 아직 데뷔 못한 친구들도 꽤 있다. 제대로 작가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진지함 반, 상업주의 반, 적당히 절충한 영화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고. 난 <두 여자 이야기> 끝나고 작가주의에서 벗어났다.
<두 여자 이야기> 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부활의 노래> 만들고 나서 다들 날 의식있는 감독으로 봤고 <두 여자 이야기> 나오니까 진지한 작가주의 감독으로 봤다. 난 똑같은데 영화 한편 만들 때마다 내 영화관이 확확 바뀌는 식으로 평가가 나오는 걸 보면서 변신이니 변절이니 그런 걸 두려워하면 안 되겠다 싶더라. <채널69>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고 <편지>는 그래서 아주 철저히 울리는 영화를 만들자, 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제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홍콩감독 허안화가 비슷한 얘기를 한 적 있다. 초기에 작가로 평가받았는데 작가라는 틀에 갇혀 작품을 만들려 하니까 너무 힘들었다고. 그러다 작가주의 신경 안 쓰고 본격적인 상업영화를 만들면서 일하는 즐거움을 되찾았다고.
물론 홍상수나 김기덕 같은 사람도 있지만 영화가 내가 자유롭기 위해 하는 건데 스스로 감옥을 만들 이유는 없다.
여러 가지 장르를 두루 해보겠다는 생각인가.
영화공부를 할 때부터 장르영화를 제대로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다. 특히 미스터리스릴러는 영화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아닌가. 잘만 만들면 세계 시장에서도 얼마든지 먹힐 수 있고. 지금 원작 판권을 사서 각색해놓은 작품이 하나 있다.
평소에 영화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하는가 보다.
난 머리가 나쁜 편이고 천재적인 소질도 없다. 그렇다고 고시공부하듯 공부하는 것은 아니고 영화가 취미이자 직업이니까. 즐거워서 영화를 보고 분석하고 그런다. 하지만 재미없으면 영화보다가 잠도 잘 잔다. 내가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영화면 몇번이고 다시 보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보다가 잠든다. 몇번 봐도 지겹지 않은 영화는 사실 드물다.
몇번 봐도 지겹지 않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게 감독으로서 이상일 텐데.
그렇다. 어릴 때 이소룡 영화를 수십번 되풀이 보게 만든 힘이 뭘까 궁금하다. 봐서 알겠지만 이소룡 영화가 영화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것은 아니다. 잊을 수 없는 몇 장면 때문에 다시 보게 된다. 아직은 내가 그런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는 걸 안다. <블루>도 좀더 욕심을 낼 걸 하는 대목이 있는데….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오늘 영화 두편을 보고 왔다며 그중 프랭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몇번씩 보다 잠들어서 끝까지 못 봤는데 오늘 보니 라스트가 얼마나 근사한지, 이래서 위대한 영화로 꼽히는구나 알았다며 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래 전에 중견감독이 됐지만 여전히 젊은 영화학도인 이정국 감독이 거기 있었다.글 남동철 [email protected]·사진 조석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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