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9월13일 개봉, 정지영 감독
정지영 감독은 “이번엔 돈 벌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품어봄직한 희망이었다. 최민수, 강수연의 투톱에다, 섹스와 음모가 교차하는 축축하고 숨가쁜 이야기. 사회파로 나선 뒤 좋은 평판을 얻었으나 정작 관객의 큰 박수는 못 받았던 정 감독에게 이 프로젝트는 흥행을 완벽하게 정조준한 것처럼 보였다. 화살은 어이없이 빗나갔다. 97년 추석에 개봉했으나, 1주일을 고비로 간판이 떨어졌다. 언론도 외면했고 비평적 주목도 받지 못했다. 비디오로 출시되면서 <블랙 잭>의 진가를 비로소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너무 늦었다.
<씨네21>이 틀렸다고 말하긴 힘들다. “미스터리 장르의 걸작 계보에 오르진 못하겠지만 현재까지 나온 이 장르의 한국영화 중 가장 수준 높은 상품”(122호)이라고 이미 개봉 당시에 평했다. 그러나 우리는 <블랙 잭>이 좀더 후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한국영화에서 이만한 수준의 필름누아르는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야기와 캐릭터의 힘을 점점 경시해가고 있는 오늘의 한국영화계가 기꺼이 배워야 할 미덕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블랙 잭>은 정통 필름누아르다. 관능적 요부와 음모의 이야기를 표지로 지닌 필름누아르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기의 장르다.
그 하드보일드한 문체 때문에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관객에게도 가장 나중에 친숙해지는 장르지만, 만드는 사람에게도 가장 세련된 장인적 세공술이 필요한 장르다. <블랙 잭>의 초반부를 칭찬하긴 힘들다. 두 배우는 아직 굳어 있고, 숏의 연결도 부자연스러운 데가 눈에 띈다.
그러나 음모의 첫장인 두 남녀의 섹스가 불붙으면서부터 <블랙 잭>은 거의 주술적 마력을 내뿜기 시작한다. 점액질의 불안과 검은 유혹이 가파른 플롯의 능선을 숨가쁘게 오르내리고, 사악한 행운을 헛발질하며 일그러져가는 타락 형사 최민수, 파멸을 예감케 하면서도 그 작은 입술의
틈새를 거부할 수 없는 독거미 여인 강수연의 얼굴은 간헐적인 클로즈업만으로도 관객의 어두운 욕망을 점화한다. 복잡하지만 빈틈없이 물고 물리는 한바탕의 음모게임이 끝날 무렵, 영화는 예기치 않은 또 한번의 반전을 내놓는다. 사족처럼 보이는 결말조차 소름끼칠
만큼 하드보일드하다. 멜로와 유머로 조미하지 않으면 어떤 시도도 실패한다는 오늘의 충무로 투자자의 확신은 정확하다. <블랙 잭>은 참담히 외면당했고, 그뒤의 어떤 영화도 이만큼 철저한 하드보일드는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 없을 것이다. 지금 나왔어도 너무 빠를 충무로
하드보일드의 진경 <블랙 잭>을 그래서, 미소하나마, 이렇게라도 축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