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성탄 전야. 홍형숙(40) 감독과 강석필(32) 프로듀서는 처음 성탄을 맞는 아들 이헌이와 놀아줄 여력이 없었다. ‘표현·창작의 자유 보장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글을 급히 써야 했다. 이들 부부를 갑작스레 바쁘게 만든 것은 저녁에 걸려온 전화 한통이었다. 국정원 소속임을 밝힌 그는 이날 저녁 8시께 전화를 걸어와, 이들 부부가 제작하고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 중이던 <경계도시>의 일부 장면이 “사실과 다르고, 또 국정원 직원의 초상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다음 상영을 강행할 경우 “나름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씨네21> 384호). 국정원이 문제시한 장면은 2001년 8월28일, 국정원 직원들이 강 프로듀서를 불러내 “제작을 중단하든지 아니면 이적성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며 압박하는 모습을 몰래카메라로 찍은 4분가량의 분량이다.
<경계도시>는 한국 정부가 친북인사라는 딱지를 붙여 30년 넘게 입국을 불허해왔던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다룬 79분 길이의 다큐멘터리. 제작기간 내내 감독과 프로듀서가 겪어야 했던 국가기관의 간섭과 이국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 ‘경계인’의 쓸쓸한 뒷모습이 맞물려 레드 콤플렉스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경계도시 서울의 비루함을 곱씹게 만든다. 2002년 12월28일 서울독립영화제 폐막식에서 홍형숙 감독과 강석필 프로듀서는, 그러나 표정이 어둡지 않았다. <경계도시>가 우수상 외에도 관객상을 거머쥐면서 이번 싸움이 자신들만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 2002년의 마지막 날, 민예총 다큐멘터리 강좌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뒤 서울영상집단에서 카메라를 나눠 든 동지로, 이제는 삶을 나누는 반려자로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서 그간의 사정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었다.
분단 현실에 관한 접근은 처음이다.
→ (홍형숙) 만들어야겠다 하면서도 매번 미뤄왔다. 그러다 1995년에 윤이상 선생이 돌아가셨다. 당시는 선생의 음악을 즐겨 듣고 있던 때이기도 했는데, 부음 소식을 듣고 나니 지금까지 뭘 했나 싶은 자괴감이 들더라.
본격적으로 기획에 들어간 건 3년이 지난 뒤다.
→ (홍형숙) 가볍지 않은 주제 때문에 파고들려면 이것저것 공부를 해야 했다. 거기다 <두밀리 새로운 학교가 열린다>를 끝내고 곧바로 <시작하는 순간-두밀리 두번째 이야기> 제작에 돌입했던 터라 늦춰졌다.
→ (강석필) 처음 기획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 테마를 두고 저울질을 했다. 비전향 장기수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도중 송환이 이루어졌고, 어느 정도 종료된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친북인사라는 낙인 때문에 입국이 금지된 인물들의 사례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이중 가장 상징적인 송두율 교수를 택했다.
촬영 전 내부적으로 합의한 원칙이 있다면.
→ (홍형숙) 연민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휴먼다큐멘터리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랬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송 교수님도 우리 생각에 동의했다.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한 인물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상징적인 인물로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영화 속에 담지 못한 인터뷰 중 기억나는 것이 있나.
→ (홍형숙) 송 교수님이 카메라를 꺼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귀국이 좌절된 이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궁금해하고 있다가 나중에 물었는데 속내를 이야기할 테니 찍지는 말라고 하셨다. 영화 속에서 내레이션으로 처리한 인상적인 답변이 그것이다.
내레이션이나 카메라 시점의 경우, 연출자의 주관적인 시점이 눈에 띄는데.
→ (홍형숙) 국내 상황을 기록할 땐 감독이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된다. 관객도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고 경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봐도 다들 어느 정도 준비된 상태로 보니까 소통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엔 달랐다. 30년 넘게 이국땅에서 살아야 했던 인물 아닌가. 내게도 낯선 경험이었던 만큼 관객 역시 마찬가지라고 봤다. 그래서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서라면 주관적인 시선의 도움이 필요했다.
제작비 마련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 (강석필) 독일 학술교류처(DAAD)의 기금을 받은 게 큰 도움이 됐다. 95년 <변방에서 중심으로>가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됐는데 그때 베를린 예술인 초청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았다. 윤이상, 백남준, 차우희씨 등 이전에 기금을 받은 이들이 각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예술가들이었으니 우리야 운이 좋았던 셈이다. 체류비용 일체를 부담해주는 것말고도 재독 한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인지 10개월의 촬영기간 동안 편하게 작업했다.
→ (홍형숙) 앞으로도 그런 집에 살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머문 곳이 40평 정도 되는 아파트였으니까. 황석영 선생이 방북 이후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었는데 사정 모르는 유학생들은 우리 보고 부르주아라고 했을 거다.
올해 부산영화제 상영에선 4분가량의 몰래카메라 장면이 빠진 채 상영됐다.
→ (강석필) 완성본 편집을 끝낸 것이 10월이었다. 인권단체, 시민단체, 영화단체들과 함께 내부 시사를 했는데 우려가 적지 않았다. 소재도 민감한데다 국정원 직원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물론 반대 견해도 있었고, 돌이켜보면 기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 국정원의 도청 의혹을 들고 나오는 등 예측 불가능한 정국 상황이라 풀버전 상영은 대선 이후로 미루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 (홍형숙) 부산영화제가 아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풀버전을 상영하기로 한 것도 그때 정한 것이다. 그때 집행위원장인 조영각씨한테 그랬다. 상영하면 끌려갈지도 모른다고. 그랬더니 그런 사안이라면 더 좋은 것 아니냐고 그러더라.
제작 중 국정원쪽에서 직간접적으로 압력을 받았는데.
→ (강석필) 2001년 8월28일 서울 모 호텔에서 직접 만난 것 외에도 그 전후로 문화관광부나 영진위를 통해 제작사항을 확인하는 내용의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 부산영화제의 경우, 상영하는 줄 모르고 있다가 부랴부랴 영화제쪽으로 연락을 취한 것 같다. 대선 정국이니 그쪽도 바쁘지 않았겠나. 그러다 최근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풀버전을 2차례 상영했는데 상영 이후 성탄 전야에 직접 전화를 걸어와서는 앞으로 계속 상영할 경우 법적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했다.
국정원쪽의 주장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 (강석필) <한겨레21>이 인용한 국정원 직원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했는데 그건 영화를 보면 틀렸는지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자신들의 행위가 국가기관의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며 선의의 조언이라고 하지만, 이는 명백히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다. 영화가 채 완성되기 전부터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창작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이는 국정원법의 권력남용 금지조항에도 어긋난다. 초상권 침해 주장 역시 인정할 수 없다. 제3자가 보아도 명백히 그 사람이 누구인지 노출되어야 하는데 뒷모습을 찍었으니 문제될 게 없다. 상영은 계속할 것이다.
몰래카메라 촬영에 대해 국가권력에 대한 개인의 방어수단이라고 했는데.
→ (홍형숙) 그건 상식 차원의 일이다. 아무런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면 나중에 그쪽에서 언제 그랬냐고 해도 할말이 없다. 현장에서 적법절차 없이 구속될 수도 있다. 그렇게 위협적인 상황에 놓여졌는데 손놓고 있을 순 없지 않나. 출산 직후라 그 자리에 갈 수 없었지만, 어떤 아줌마가 그런 상황의 남편에게 ‘혼자 잘 다녀와’ 할 수 있겠는가.
→ (강석필) 현장에 놓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 긴장감을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소설 쓴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80년대 말 변사체로 발견됐던 이내창씨의 경우도 떠올랐다.
촬영 분량을 영화 속에 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 (홍형숙) 일차적인 고발이나 폭로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때 만났을 때 발표하고 그랬겠지. 당시에도 주변에선 인권운동단체들에 상황을 전한 뒤, 국정원과 싸우라고 했다. 하지만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싸움만이 남는 결과를 바라진 않았으니까. 그 장면을 넣은 것은 낯선 땅에 사는 입국금지에 관한 한 개인에 관한 다큐로서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남은 경계도시 서울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판단해서 넣은 거다.
→ (강석필) 영화 처음과 끝에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누군가에 대해 말하는 일상적인 행위조차 결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라는 자막을 넣었는데, 실제 관객도 그 장면을 보고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더 실감하는 것 같다.
앞으로의 상영 일정 계획은.
→ (홍형숙) 1월에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에서 상영될 예정이고, 이후에도 꾸준히 기획 상영을 할 예정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들이 늘었는데 이들을 위해 웹상에서 상영을 준비하고 있고, 궁금해하는 관객으로부터 신청을 받아 상영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일반 극장 상영을 배제하고 있진 않지만, 이전의 사례를 볼 경우 투여했던 에너지에 비해 반응은 미비한 편이라 일단은 지켜보겠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에 출품 의사를 밝혔는데, 설령 상영기회를 얻지 못하더라도 따로 소규모 상영을 해야겠지.
<경계도시>가 어떤 작품으로 남았으면 싶나.
→ (홍형숙)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으면 한다. 만든 제작진을 포함해서 레드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운 이들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반응은 절반의 지지와 절반의 거부로 나타날 텐데 오히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분단에 관한 하나의 쟁점이나 이슈가 형성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 (강석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분들에겐 작은 위로가 됐으면 한다. 물론 새 정부가 들어서는 마당에 이들이 조건없이 귀국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 그런 생산적인 논의들을 촉발시키는 데 <경계도시>가 힘이 됐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차기작은.
→ (홍형숙)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장기적으로 분단과 통일에 관해 좀더 천착하고 싶다. 사실 한국에서 다큐하는 감독들에게 분단은 마지막으로 남은 화두와 같다. <경계도시>로 이제 첫발을 뗀 셈이니 앞으로 좀더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생각이다. 글 이영진 [email protected]·사진 조석환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