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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국] 충무로에 봄은 올까
2002-12-24

한국 영화계가 꽁꽁 얼어붙었단다. 극장에는 연일 관객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긴 하지만, 제작 일선에 있는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엄동설한이라고 입을 모은다. 돈이 말라붙었다는 것이다. 들리는 소식에 따르면 투자사들의 자금 집행이 긴축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동결됐다고 한다. 그 여파로, 주연배우 캐스팅을 확정하고 촬영일정까지 공표했던 영화가 제작을 포기하거나 무기한 연기하고, 이미 촬영 중인 영화도 무사히 촬영을 끝내고 완성할 수 있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물며 기획 중인 상당수 작품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내몰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마치 황금어장이라도 만난 듯 돈이 몰려들었던 영화계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투자사들은 긴축 또는 동결의 배경이 한국영화로 돈을 벌지 못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올해 개봉한 영화 제목들을 떠올려보면 흥행성적이 좋았던 영화가 그리 많지 않아 투자사들의 쓰린 속을 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세간의 화제가 됐던 덩치 큰 화제작들이 줄줄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체감경기를 악화시켜 위기감이 증폭됐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영화진흥위원회가 집계한 최근까지의 한국 시장 동향은 투자사들이 주장하는 상황논리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점이 있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가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1월까지 한국영화는 86편이 개봉해 1641만7600명(서울 관객 기준)의 관객을 불러모았으며,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45.8%로 집계됐다.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같은 기간 46.1%에 비해 0.3% 떨어졌지만 전체 한국영화 관람객 수는 14.4%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2000년 58편, 2001년 52편에 비해 무려 28~34편이나 늘어났으며, 2000년 32.0%, 2001년 46.1%에 이어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년과 비교해 가장 큰 변화는 올해 제작편수가 상당히 늘었다는 것이다. 물론 올해 개봉영화 편수는 제작시기와 개봉시기가 연도별로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점은 있지만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는 있는 근거로는 모자람이 없다.

투자사들이 돈을 벌지 못했다는 말은 투자한 돈에 비해 거둬들인 돈이 적다는, 즉 손해를 보거나 수익률이 낮다는 것이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개봉영화 편수가 예년에 비해 상당히 많아 편당 수익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영화 시장 전체를 놓고 보면 투자사들의 주장은 미시적인 상황 논리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한 투자사에서는 최근 검증된 감독에, 호평받는 시나리오에, 최고 스타급 배우 3명을 캐스팅까지 한 작품에 대해서도 투자여부를 확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전이라면 스타 1명만 캐스팅되어도 선뜻 제작비를 내주던 행태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상황이다. 시장을 선도하는 투자사에서 수익률이 낮다고 엄연히 시장이 존재하는데 마치 여차하면 영화제작에서 손을 떼기라도 하겠다는 듯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해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업계 판도를 좌우할 수 있는 투자사에서 제작환경을 경색시켜 지나치게 업계 전체를 위축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물론 자본이 많아지면서 제작사의 부실 기획과 일부 거품이 수익률 하락의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긴 하지만 투자사들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본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돈이 넘쳐나지 않았으면 만들 수 없었던 영화, 만들지 않으니만 못한 영화도 적지 않게 있다. 투자사들도 제작사의 부실을 방조하거나 조장했다는 지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부문이든 산업적으로 성장하면 그 토대와 기반은 단단해지고, 경기나 외적 환경에 따라 현상적인 부침은 있더라도 전체적인 판도가 뒤흔들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지금은 한국영화도 근래 몇년 사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산업적 안정성이 강화되고 있는 중대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사가 반성하고 감당해야 할 과제가 또한 적지 않지만, 지금처럼 투자사들이 일률적인 긴축과 동결이라는 강경한 미봉책은 합리적인 해법이 아니라고 본다. 하루라도 빨리 영화계에도 봄이 오기 바란다. 조종국/ 조우필름 대표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