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균 감독은 좀처럼 ‘감독님’으로서 폼을 잡거나 점잔을 빼는 일이 없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LG애드에 들어갔던 내력을 묻는 질문에 “광고를 하면 매일 연예인들하고 논다고 그래서”라고 답하는가 하면, 좋아하는 감독은 “히딩크”란다. “추진력, 선수들에 대한, 내 경우라면 배우가 되겠지만, 신뢰, 그것도 이름값을 떠난 실력 자체에 대한 믿음, 긴장 속의 여유” 등등 설명까지 덧붙이며. 20대의 성적 에너지와 섹스를 둘러싼 해프닝을 적나라하게 담아내면서 늦깎이 대학생 은식의 우직한 순정을 보여주는 그의 최근작 <색즉시공>만큼, 거침없는 성격이랄까.
윤제균 감독은 지난해 12월,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 등 전국 관객 400만명 이상을 동원한 조폭코미디의 대열에 합류한 <두사부일체>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렀다. LG애드 전략기획팀에 4년간 몸담았던 그는, 99년 세계 인터넷 광고 공모전에서 LG그룹의 동영상 광고로 대상을 수상했던 유망한 광고인 출신. 99년 태창흥업의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 <신혼여행>으로 시나리오 작가의 직함을 얻었고,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스토리 아티스트를 거쳐 기획단계에서 엎어진 <뮤즈>, 올해 개봉된 <도둑맞곤 못살아> 등을 썼다. 고등학교로 돌아간 조폭들의 웃기는 소동극에 사학 비리에 대한 풍자를 슬쩍 녹인 <두사부일체> 역시 그의 자작 시나리오. 광고계에서 네티즌 펀드사업체인 엔터펀드로 자리를 옮긴 뒤, 투자사 중 하나였던 필름지가 <두사부일체>를 영화화하면서 직접 연출까지 맡게 됐다. 지난 5월 강남 신사동에 영화사 두사부필름을 차린 그는, 12월12일 두 번째 영화 <색즉시공>을 선보였다.
<두사부일체>는 지난해 조폭코미디의 계보를 이어가며 성공을 거뒀고, <색즉시공>은 최근 흥행작인 <몽정기>의 뒤를 이어 섹스코미디다. 유행장르, 혹은 흥행코드에 민감한 편인가.
→ 섹스코미디로 포장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두사부일체> 무렵이지만, 나한테 <색즉시공>은 꽤 오래된 얘기다. 내 또래는 10대 때 <그로잉 업> <프라이빗 스쿨>에 열광하며 자란 세대고, 그때부터 생각했던 것들이니까. 육체적인 사랑과 성에 대한 이야기와 새로운 장르에 대해 고민하다가 섹스코미디를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는 섹스코미디란 장르가 거의 없었는데, <색즉시공> 개봉할 때 되니까 꽤 나오더라. <마법의 성> <몽정기> 등등. <두사부일체> 때도 그랬지만, 뒤늦게 일부러 따른 게 아니라고 해봐야 믿어주겠나.
<색즉시공>도 직접 각본을 썼는데,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 내가 겪은 이야기가 80%, 주위에서 봤거나 들은 에피소드들이 20% 정도다. 설문조사, 온라인을 통해 성경험 조사도 했고. 은식이란 캐릭터는 나랑 닮았다. 잘생긴 것도 아니고,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촌스럽고, 그러니까 연애도 잘 안 되고…. <색즉시공>에 쓴 대사처럼, 사랑은 장난이 아니다. 소중히 해야 하는데, 너무 쉽게 장난처럼 한다면 여성의 입장에서는 섹스에서 상처받을 가능성이 많다. 남자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성과, 여자들이 생각하는 남자의 성에는 차이가 있다.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동물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행동에 옮길 때는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장난이 아니니까 책임이 필요하다. 사랑도, 섹스도 책임감 있게, 지극히 건전한 생각에서 나온 영화다.
경험이 80%? 쥐를 삼킨다든지, 쥐약이 든 샌드위치, 정액 프라이 등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과장이 지나치다는 인상도 드는데.
→ 거의 다 실화다. (웃음) 고등학교 때 야간자습 시간에 쥐가 나타나서 난리가 났었는데, 우리반 짱이 그 쥐를 잡아서 먹을 듯한 시늉을 하다가 벌린 입 속으로 피투성이 쥐를 떨어뜨렸다. 그뒤로 한 달 동안 아무도 걔랑 밥 같이 안 먹고 왕따시켰다. (웃음) 대학 시절에는 반지하 하숙방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샌드위치에 쥐약을 놨는데, 후배 한놈이 덥석 그걸 먹었다. 당연히 병원에 실려갔지. 영화에서는 너무 늘어질까봐 뺐지만, 음독자살을 시도한 이유가 뭐냐고 경찰에서 조사받고, 부모님도 시골에서 올라오시고…. (웃음) 아무리 사실대로 얘기해도 믿질 않더라. 정액 프라이도 축산과 다니던 친구가 교수님께 계란과 정액의 성분이 같다는 말을 듣고 와서 실험해 보였던 것이다.
일상은 배제되고 필요 이상으로 섹스신과 노출이 많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 그게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카메라 기법으로 안 보여주고, 가릴 수도 있지만, 부자연스럽지 않나. 리얼하게 찍고 싶었다. 노출신은 특히 여배우들한테 민감한 부분이라 영화 시작할 때부터 계약서에도 명시했다. 노출신이 많으니 자신없으면 안 해도 된다고. 하지만 다들 정말 몸을 아끼지 않고 해줬다. 무슨 대학생들이 공부도 안 하고, 하루종일 섹스만 생각하느냐는 말도 들었다. 영화가 3∼4시간쯤 되면 성의 비중만큼 일상생활도 집어넣었겠지만, 기껏해야 1∼2시간이기 때문에 하고 싶었던 성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췄다.
만화적인 정지컷으로 등장인물을 보여주는 도입부나 에어로빅 대회의 역동적인 앵글 등 전작에 비해 카메라의 기교가 늘었다.
→ 영화는 드라마와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 볼거리에 신경을 썼다. 에어로빅 대회에서는 다이내믹한 영상을 보여주고, 차력은 아픈 은효 앞에서 보여주는 코믹한 차력과 에어로빅 대회장의 정통 차력으로 나누고. 상업영화로서 관객에게 하는 일종의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에어로빅도, 차력도, 다 대역없이 찍었다. 하지원도, 진재영도 태어나서 에어로빅 처음 했는데, 4개월 동안 근육이 파열될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다. 임창정도 쌍절곤, 깨진 유리병 위에 누워서 보도블록 깨기, 다 직접 했다. 배우들이 정말 온몸을 바쳐서 찍은 영화다.
감독이 되기까지의 이력이 꽤 특이하다.
→ 2년 전만 해도 감독이 될 줄 알았겠나. 지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난 LG애드 윤 대리였다. 상대를 나와서 은행, 금융회사에 합격하고, 우연히 선배 따라 LG애드에 원서를 냈다가 합격했다. 월급은 금융계가 2배지만 광고를 하면 매일 연예인들하고 논다고 그래서 갔는데, 상대 나왔다고 전략기획팀으로 발령을 내더라. (웃음) 광고 제작팀에 가야 연예인들을 만날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98년 IMF 때 직원들에게 돌아가면서 1달간 무급휴가를 줬다. 돈이 있었으면 여행을 갔겠지만, 돈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집에 처박혀 글쓰는 것이었다. 그때 시나리오나 써보자고 쓴 게 <신혼여행>이었다. 그 다음해 3월인가 <씨네21>을 보니까 태창흥업에서 시나리오 공모를 한다고 났더라. 상금이 3천만원이기에 혹시나 하는 맘으로 냈다가 당선됐다.
시나리오 작가로 먼저 영화계에 발을 디뎠는데, 원래 감독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 영화를 좋아했고,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딴 나라 일 같은, 정말 꿈일 뿐이었다. 그런데 월드컵 관중석에 보이던 ‘꿈은 이루어진다’처럼, 정말 꿈이 이뤄져버렸다! 엔터펀드에 다닌 덕분에 투자 메커니즘도, 투자자들도 알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발한발 영화로 다가갔던 것 같다. 내가 작가란 걸 아는 투자자들이 인사치레로 좋은 시나리오 없냐고 묻곤 했는데, <두사부일체>를 본 필름지가 영화화하겠다며 감독을 물색했다. 내가 한번 해본다고 할까, 하고 말을 꺼냈다가 처음엔 욕먹었다. (웃음) 하지만 결국 2년 만에 영화 2편을 만들고, 감독으로 불리다니…. 지금은 감독이 돼서 행복하다.
스릴러, 조폭영화, 멜로드라마 등 양념은 다르지만 코미디 색채가 강한 작품들을 써왔다.
→ 영화화는 안 됐지만 <트루>는 외계인이 나오는 SF였고, <뮤즈>는 북한 최고의 소프라노와 남한의 세계적인 지휘자의 멜로드라마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대중적으로 포장하려고 하는데, 다들 그 포장에 더 열광하는 것 같다. <두사부일체>는 사실 사립학교 이야기를, <색즉시공>은 가슴아픈 멜로드라마를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포장이 웃긴다니까… 연출을 잘 못해서 그런가(웃음) 어렸을 때부터 남들을 웃기는 캐릭터이긴 했다. 웃기는 데는 좀 자신이 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또 다르다. 최근에 본 <오아시스>나 <반딧불의 묘> <파이란>처럼, 감정을 움직이는 영화. 멜로로 치면, 멋지고 완벽한 사람들의 사랑에는 별 매력을 못 느낀다. 빈틈이 많고, 모자라고, 못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맘이 움직인다. 순수한 것, 진실된 것. 그래서 코미디도 진실되게, 리얼하게 가고 싶었다.
유행을 감안했 건 아니건 영화를 대중적으로 포장해내는 감각이 있는 것 같다.
→ 광고회사를 다녀서 그런가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라도 포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오아시스> 같은 영화가 나오는가 하면, <색즉시공> 같은 영화도 나온다. 포장은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로 하고 싶다. 내 개인적인 취향이겠지. 심각한 주제라도 쉽게 풀고. 영화는 관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의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그 게임을 즐긴다. <색즉시공>의 경우, 이 장면이 웃기세요, 슬프세요, 하고 그 사이를 오가는 게 좋았다. 시사 반응을 보니까, 은식이 은효 앞에서 차력하는 장면에서 관객의 반은 뒤집어지고, 반은 슬퍼하더라.
연출작 두편 다 평단의 반응은 후하지 않았는데, 신경쓰지 않는 편인가.
→ 인간인데, 별 하나, 둘 받고 기분 좋을 리는 없지. (웃음) 하지만 작가주의적 관점이냐, 대중적인 관점이냐 취사선택의 문제 아닐까. 난 대중들한테 사랑받는 감독이 되고 싶다. 쌈마이란 욕도 듣는데, 하도 많이 들어서…. (웃음) 꼭 나쁜 거라고 생각 안 한다. 그래 쌈마이다, 그러고 말지, 뭐. 사회에서 다양성이 필요하듯, 영화도 다양한 영화가 필요하다. 이창동 감독, 김상진 감독도 각각 다르지만 사랑받는 감독들이다. 나만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관객이 생겨서 내 영화를 즐겨준다면, 이 사람 영화 언제 나오나 기다리게 된다면 좋겠다. 임권택 감독처럼, 이창동 감독처럼,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감독이 되기 얼마나 어려운가. 내 다음 영화를 누가 기대하려나
<색즉시공>의 흥행은 어떻게 예상하나.
→ 순제작비가 25억원 정도인데, 잘 모르겠지만 손해는 안 볼 것 같다.
다음 영화 계획이 있나.
→ 구체적으로 정한 것은 없다. 1년에 한 작품씩 하다보니까 진이 빠졌다. 조금 쉬면서 다음 작품 생각해야지. <두사부일체>나 <색즉시공>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 같다. 관객이 즐거워하고 재밌어하는 영화. 다른 일 영화하기도 바쁜데, 영화에 목숨 걸어야지. (웃음) 승부를 보기까지는.글 황혜림 [email protected]·사진 오계옥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