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어느 날 밤, 자정이 지난 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를 담은 TV 시사프로그램의 방영이 끝난 직후였다. 전화의 주인공은 류승완 감독. “저, 승완인데요, 지금 TV 보셨죠 그냥 이러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혜정이(그의 처)도 펑펑 울고…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무슨 일인가 해야겠어요. 삭발 시위라도 할 테니 주선 좀 해주세요….”
나는 순간 당황해서 “혼자 하는 것보다 가능하면 힘을 모으는 게 좋겠고, 어떤 방식이 좋을지 한번 고민해보자…”고 대답하고는, “같이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들 취지에는 공감하겠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쉽지 않을 텐데…”라며 자조 섞인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여유부린답시고 “이런 일말고 좋은 시나리오를 하나 썼다든가 ‘쌈빡한’ 영화 아이템이 있다는 전화 좀 받고 싶다…. 삭발하는 건 영화인회의 실무자들과 일정과 형식을 의논해보겠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전화를 끊고는 낯이 화끈거렸다. 나는 그동안, 어린 학생들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허망하게 희생당한 사건이 발생하고, 가해 미군에 대한 수사와 재판과정, 우리나라 정부의 입장과 미군(미국)의 대응, 연일 항의집회를 열던 시민들과 대책위 관계자들의 처절한 분노를 보면서도 ‘적당히’ 분노하면서 솔직히 한편으로는 혼자 낙담하고 말았다. 게다가 영화쪽 사람들은 영화계의 직접적인 현안이 아닌 사회적 이슈에 대해 무심하다는 편견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세상의 정의는 혼자 다 지키기라도 하는 듯 침을 튀기고, ‘지사’인 척한다는 조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여기저기 이름을 들이밀곤 했다. 하지만 정작 이런 일에는 겨우 인터넷 메신저 아이디 앞에 조의 표시를 다는 것으로 자위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컸다.
영화인회의 유창서 사무국장에게 귀찮은 실무를 은근히 떠넘기는 통화를 한 날, 다시 류승완이 전화를 했다. “박찬욱, 김지운 감독님도 흔쾌히 동의하셨고, 김지운 감독님은 촬영 중인데 시간만 맞으면 같은 자리에서 삭발하시겠답니다….”그 전화를 받으면서 다시 한번 낯이 화끈했다. 혹시 속뜻과는 달리 류승완 감독 혼자 ‘오버’하는 것처럼 오해를 살 수 있겠다는 걱정이 기우였음을 확인했고, 그런 우려를 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서둘러 몇몇 단체들과 같이 ‘여중생 압사사건 무죄 판결에 대한 방송문화예술인 선언’을 하기로 했다. 11월6일 광화문 미대사관 옆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는 이춘연 영화인회의 이사장, 배우 최민식씨, 정진영씨, 변영주 감독, 이현승 감독, 황철민 감독, 임창재 감독 등이 직접 참석해,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미국 부시 대통령의 직접 사과, SOFA 전면 개정을 촉구했다. 박찬욱, 류승완 감독은 회견장에서 삭발로 결의를 밝혔고, 촬영 때문에 못 나온 김지운 감독은 양수리 촬영현장에서 따로 삭발을 했다. 또 배우 문소리, 추상미, 권해효씨 등 50여명의 영화인들도 뜻을 같이한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서둘러 준비하느라 미처 두루 연락을 못한 탓에 적극 참여할 뜻을 가진 많은 분들이 함께하지 못해서 오히려 미안할 따름이다.
순간순간 영화쪽 사람들이 제 밥그릇만 챙기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무심하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유치한 생각이었는지, 부끄럽다. 우리 영화의 커진 외형보다 영화인들의 시대정신이 훨씬 더 성숙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느꺼울 따름이다.
자백 한 가지 더. 우리 회사 제작부장은 자동차 뒷 유리창에 ‘SOFA 전면 개정! 우리나라는 우리 법으로!’라고 쓴 종이를 붙이고 다닌다. 내 차에도 붙이고 다니라고 큼지막하게 프린트를 해줬는데 며칠 동안 미루다가 어제부터 붙이고 다닌다. 그동안 비가 와서 안 붙였다느니 깜빡 했다느니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새로 산 차에 그런 거 붙이고 다니다가 누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나…. 새 차 걱정이 앞서서 안 붙였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조종국/ 조우필름 대표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