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자신의 영화보는 눈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물론 느끼는 건 있으니 좋아하는 영화도 있고 싫어하는 영화도 있지만 이것은 대개 전문가들의 세련된 평가와는 매우 거리가 있다. 10년도 더 전, 별로 되는 일도 없고 될 것 같은 일도 없던 시절, 한 친구와 나는 “뭐 재밌는 거라도 좀 보자”며 돈까지 빌려 극장에 갔다. 우리가 고른 영화는 바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어? 어? 하는 사이 영화는 끝이 나버렸다. 어렵사리 봤는데 느낌이 별로라면 피차 무안할 것 같아서 둘 다 썰렁한 기분을 누르고 “재밌지?” “응, 재밌어. 영화 좋네” 했던 기억이 난다. 이게 어마어마하게 화제가 되고 큰 상까지 받은 작품이란 건 나중에 알았다. 기분이 묘했다.
그로부터 몇년 뒤.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던 옛 애인과 나는 뭔가 아주 웃기고 즐거운 영화를 봄으로써 분위기를 좀 따뜻이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역시 없는 돈에 <에이스 벤츄라>를 보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분노가 일 정도로 재미없는 영화였다. “우린 되는 일이 없다 못해 내 돈 내고 재밌는 영화 한편도 못 보는 그런 사람들”이라며 난 울기까지 했다. <에이스 벤츄라>를 보고 슬퍼서 운 사람은 전세계에 아마 나 혼자일 게다. 그런데 이게 심지어는 엄청 흥행 잘되고 짐 캐리라는 스타를 탄생시킨 영화라는 걸 나중에 알고 정말 씁쓸했다.
다시 몇년 뒤. 영화지 기자가 되어 칸에 갔는데 그 많은 경쟁작들 중 난 제대로 한 작품도 찍어낼 수가 없었다. 한편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챙겨 봤지만 이제야 솔직히 얘기하건대 제대로 이해되는 작품이 거의 없었다. 사람들에겐 “너무 피곤하다보니 자꾸 졸아서”, “너무 많이 보니 지쳐서” 등으로 둘러댔지만 실은 뭔 말인지조차 잘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TV베스트극장 정도면 딱인데 왜 이런 걸 영화로 만들었나, 했던 <우나기>가 대상을 탔을 때 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편집장도 바뀌고 해서 일종의 공소시효가 끝났을 거라고 보기 때문에 맘놓고 고백하는데, 당시 내가 “별로예요, 수상가능성 없는 것 같아요”라고 호언장담하며 보고했던 영화들은 실은 다 내가 아예 이해를 못한 영화들이었다.
<트래픽>을 보기 전 기대를 많이 했다. 내가 아는 가장 머리좋은 필자, 가장 세련된 안목의 필자, 가장 독특한 취향의 필자들이 모두 입을 모아 상찬한 것을 보고는 가슴마저 두근두근했다. 그래서 마약이라면 어떤 콘텍스트하에서도 보기 싫다는 매우 건전한 친구까지 꼬셔 영화를 함께 보았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동안 지루하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뭔지 몰라도 사람들이 앞다투어 칭찬했던 대목이 이제 나오나 저제 나오나 하며 꽤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러다가 갑자기, 어, 이 영화 여기서 끝나버리는 거 같애, 싶더니 진짜로 끝나버렸다. 엥? 뭐 이래?
틀림없이 재밌을 테니 같이 보자는 말에 넘어가줬던 친구는 날 동정했다. 넌 이제 저거 갖구 글까지 써야 되지? 안됐다. 나야말로 황당했다. 대체 뭘 쓰지? 전문가들이 다 좋다고 말한 영화를 나만 아무 느낌없이 봤을 때 대체 뭐라고 쓸 수 있을까? 흥행성적이 무지 좋은 걸로 봐서 일반 관객도 다 좋게 본 모양인데. 난 일반 관객도 못 되는 일반미달 관객인가. 하지만 세 가지 이야기를 관객 헷갈리지 않게 풀어낸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색깔을 달리하든 뭘 어쩌든 어쨌든 만드는 사람은 관객 혼란스럽지 않게 얘기해야 되는 거 아닌가? 관객이 그런 테크닉까지 감안해가며 영화를 감상해야 되나? 마약이 개인의 품성이나 결단문제가 아니라 거대한 뿌리를 갖고 있으며 매우 무시무시한 놈이라는 거, 누구 모르는 사람 있나? 야구장 만들면 마약이 없어지나? 괜한 짜증은 캐서린 제타 존스에 가서 폭발해버렸다. 거의 만삭이니 파출부를 뛰기야 어렵다 쳐도, 먹고살기 위해 겨우 한다는 일이 남편을 대신해 마약 비즈니스에 뛰어드는 거라니. 지 새낀 끔찍이 여기면서 다른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 일에 투신하는 나쁜 X.마약 커넥션이라는 게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게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도 알겠고 그 속에서 개개인은 무력하다는 것도 알겠고 이야기도 재미없진 않았다. 하지만 난 어째서 이게 그리도 대단한 영화인지 여전히 모르겠고, 그런 안목을 가지고서 영화지의 한 코너를 담당하고 있단 사실이 어불성설인 것도 같다. 모두의 눈에 자명한데 나에게만 안 보이는 그게 과연 무엇일까?
그래도 예전보단 덜 답답하다. 요즘은 잘 이해못한 영화에 대해 “괜찮더라”, “만들긴 잘 만들었던데”, “그래도 흥행은 모르지. 대중이야 워낙에…”식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체면치레와 거짓말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바뀐 신분을 이용해 시원하게 소리쳐보자. 나는 <트래픽>이 왜 그리 대단한 영화인지를 전혀 모르겠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PS. 지지난호에 <친구>를 쓰고서 정말 편지함이 터져나갈 정도로 많은 메일을 받았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주소만 제것일 뿐 다 제 남편에게 온 팬레터들이었습니만 어쨌든 놀라운 관심과 격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남편은 “진실은 살아 있다,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며 매우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오은하 | 대중문화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