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로빈슨 크루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끈질긴 ‘삶의 투쟁’을 보았을 때도, 별반 감동하지 않았다. 꼭 그렇게 힘들여 살아야만 하나? 나이가 들어 ‘제국주의적’인 야심을 은근히 드러내는 근대정신의 수호자라는 것을 안 뒤에는 씁쓸했다. ‘생존’을 위하여 야생의 섬과 원주민과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 드는 건 분명 고약한 심성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를 백인들의 휴양지처럼 만들어버렸다. 물론 한 개인으로서의 생존본능까지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생존은 그 자체로 의미있을 수도 있다. 나 같으면 게을러서 얼마 안 가 죽어버렸을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거나 Q채널에서 지난해 미국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서바이버>를 방영한다고 했을 때, 별 관심이 없었던 건 그런 배경 탓이었다. 수만명의 지원자 중에서 16명을 오지로 보내고, 그곳에서 투표를 통해 하나씩 탈락되어 마지막에 남은 ‘최후의 1인’이 100만달러를 챙긴다. 거칠게 말하자면 TV의 퀴즈쇼나 별다를 것 없고, 거기에 ‘야만’의 포장을 덧씌운 것 정도밖에 더할까. 그게 내 선입관이었다.
하지만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만난 <서바이버>는 꽤 흥미로웠다. 출연자들은 두개의 부족으로 나뉘고, 함께 의식주를 해결한다. 그들 사이에서 협동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경쟁자다. 처음에는 집단간의 경쟁이다. 부족간의 게임이 벌어지고 진 팀은 한명을 내부투표로 탈락시켜야 한다. 한 부족이 연달아 게임에 지자, 부족원들은 ‘약한 사람’을 먼저 탈락시킨다. 게임에서 진 이유가 그의 ‘약함’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지던 부족이 각성을 하고 하나로 뭉치자, 마침내 게임에서 이긴다. 그리고 얼마 뒤, 두 부족이 하나로 합친다. 합치기 전에는 각 부족이 신경전을 벌인다. 어쨌거나 함께 생활하는 동안 정이 들었고, 그들은 상대 부족원에게 적개심까지는 아닐지라도 경쟁심은 확연하게 드러낸다. 하나의 부족으로 합쳐 투표를 하게 되자, 그들은 상대방 부족의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표를 던진다. 결국 수의 우세를 확보한 부족이 소수를 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바이버>를 조금씩 보다보니, 정말 흥미로웠다. 이건 야생에서의 생존게임이 아니라, 사회에서의 생존게임이었다. 부족간의 대립이 치열하다가, 점차 수가 줄어들며 개인간의 경쟁이 전면에 드러나자 타깃은 ‘개인’으로 바뀐다. 한 흑인여자는 너무 체력이 좋기 때문에,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일찌감치 탈락된다. 전체의 화합을 해치는 사람도 탈락된다. 능력이나 인간성이 너무 뛰어나도, 너무 처져도 ‘최후의 1인’은 될 수 없다.
<서바이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문명이란 옷을 벗겨내자 드러난 맨얼굴과 똑같다. 세상이 너무 각박해졌다, 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건 언제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내치는 것, 집단의 힘으로 소수를 밀어내는 것, 결국은 ‘최후의 1인’을 향하여 눈돌리지 않고 뛰어가는 것. 그냥 쿨하게, ‘산다는 게 다 그렇지’라고 생각하면 <서바이버>는 아주 흥미로운 게임이다. 하지만 조금 사선으로 비껴나면, <서바이버>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지독한 ‘고발’이다. 인간은 타인을 짓밟지 않고는,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존재다.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또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