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벼운 변비 환자였다. 그래서 아침마다 화장실로 직행해 큰 일을 보는, 같은 방을 쓰는 남자가 내심 부러웠다. 변비가 여러 가지로 안 좋다하여, 특단의 조치를 취해 모 식품을 복용한 이후로 증세가 급격히 호전되었다. 요즘은 아침마다 변기 위에 걸터앉는 기회가 생겼지만, 그때마다 내 머리를 스치는 경구 같은 문장 하나, “제작자 똥은 개도 안 먹는다”. 황기성 사장님이었나, 몇년 전 내게 그런 얘기를 해주셨다. 골치 썩고, 가슴앓이하고, 신경쓸 일 많은 사람 중 으뜸인 제작자의 똥은 그래서 개도 안 먹을 거라고.
20여년 전, 자주 가는 극장에서 ‘황기성사단’이란 제작사 크레딧을 보곤 가슴이 후끈 달아오른 적이 있었다. 뭐가 흥하고, 별이 빛나고, 그래서 번영하자는 뜻의 구태의연한 영화사 이름들이 난무하던 시절, 자신의 이름을 걸고, 거기에 ‘사단’이란 집단적 의미를 덧붙여 만든 영화사 제목이 무척이나 모던하고 멋들어져 보였다. 그 크레딧을 달고 나온 영화들은 볼 만했고, 어떤 영화들은 빼어났다. 막연히, ‘황기성사단’ 혹은 ‘황기성 사장님’은 일정 부분 나의 역할 모델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러 나 역시 제작자가 되고 나서 우연찮게 황기성사단을 자주 들락거렸다. 고민거리가 있거나, 그래서 현답을 필요로 할 때만 주로 찾아갔던 것 같다. 올해는 특히나 골치 썩은 일, 가슴에 멍든 일이 많았다.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많았는데 최근 며칠 동안엔, 모 배우와의 소송제기건으로 <공동경비구역 JSA>를 제작했을 때만큼이나 ‘명필름’이란 이름이 신문 지상에 많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문화 또는 대중문화의 총아격인(정말 그럴까)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다보니 그만큼 비즈니스의 내용은 만만치 않다. 책임질 일, 해결해야 할 일, 계산할 일, 머리 쓸 일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소명의식까지 당최 산처럼 높다 하겠다. 나쁜 쪽으로 머리 쓸 일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에 머리통을 맞는 일이 허다하니 이젠 기운이 빠지고, 상처가 깊어지는 게 장난이 아니다.
그러면서, 충무로 다이어리에 이 얘기, 저 얘기 찾아 써내려가는 것이 능력 모자란 나에겐 고통을 배가시켰다. 처음 ‘충무로 다이어리’ 꼭지를 마련하면서 정중하게 원고청탁을 했던 <씨네21>과 나와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빚을 받아내려는 자와 갚아야 하는 자의 관계처럼 되어버렸다. 원인 제공은 물론 나다. 한번의 원고 펑크와, 수시로 마감시간을 어기게 되면서 원고를 받아내야 하는 담당기자에게 매번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어쨌든, 비록 격주지만 무얼 써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턱없는 생각의 사치라고 여겨질 만큼 여러 가지로 고달픈 요즈음, 이쯤에서 그간의 졸필 행진을 마칠까 한다, 라고 써서 <씨네21>에 보냈다가, 부산에 가 있는 편집장님으로부터 12월까지는 써야 한다고, 무슨 소리냐고 한 소리들었다. 하, 원고 기고도 내 마음대로 끝을 못 내는 신세이다.
“제작자 똥은 개도 안 먹는다”라는 말을 거듭 실감하고 있는 중이지만, 당분간은 그 똥이 약으로 쓰일 날이 있을 거라는 모진 꿈을 가지고, 살아가려 한다. 일단은 충무로 다이어리도….심재명/ 명필름 대표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