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재미있다”는 것이다. 사실 ‘재미’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어서 나한테는 재미있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재미있는 가장 큰 이유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뭔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데 있다고 본다.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작품에 몰입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열혈팬이 되게 마련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주인공 스스로 생각이나 고민을 많이 함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 이를 전이시키는 경우다. <미래소년 코난>에서 주인공 코난은 문득문득 ‘푸른 하늘 저 멀리’ 쳐다보며 상념에 잠기곤 한다. 연속되는 사건 가운데 끼워져 있는 이런 ‘쉼표’는 대단한 여운을 준다. 시청자로 하여금 주인공이 된 듯한 감정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쯤 되면 사정은 심각해진다. “내가 왜 싸워야 해 난 도대체 뭐야”라는 주인공 이카리 신지의 처절한 고민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동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또 다른 유형 중 하나가 주인공을 아무 생각없이 행동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다양한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경우다. <캡틴 테일러>(The Irresponsible Caption Tylor)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몇년 전 TV에서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이기 뭐 이런 게 다 있노”라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편하게 살고 싶어” 우주연합군에 지원한 방년 20세의 유들유들한 청년 저스티 우에키 테일러. 얼떨결에 공을 세우고 특진, 우주전함 산들바람호의 함장으로 부임해 라르곤 제국과 대결하게 된다는 첫 이야기의 발상부터 황당했다. 뿐만 아니다. 적이 나타났다는 소리에 “항복하지 뭐”라고 내뱉는 ‘한심한’ 함장이기도 하다. 한심해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산들바람호 대원들에게 테일러의 자유분방하고 무책임한 생각은 생뚱맞고 낯설기만 하다. 그들이야말로 애간장이 타서 “뭐 이런 만화가 다 있노”라고 외쳤을 법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을 이끌고가는 힘이 아닌가. 우리가 사는 현실을 기준으로 하고보면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설정. 하지만 시청자들은 어느새 “쟤 저러면 어떻하지”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작품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테일러의 느긋한 생각과 앞뒤 재지 않는 돌출행동이 슬슬 통쾌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실 그에게도 탁월한 장점이 있음을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 입장을 배려하고 이를 말로 풀어주는 타고난 입담이다. 그가 공을 세우게 된 계기도 하너 제독을 인질로 삼은 라르곤 제국의 스파이 중 못생겼다는 이유로 제독의 딸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스파이에게 “남자답다”고 칭찬한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던가. 그의 진심어린 칭찬과 자신을 이해해주는 말을 들은 산들바람호의 대원들은 어느새 하나둘 진정으로 테일러를 믿고 따르게 된다.
<캡틴 테일러>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무능력해 보이는 테일러를 함장으로 모시게 된 산들바람호 대원들은 각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지도자를 믿어서는 자기 목숨이 위태롭기에. 하지만 결국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그를 진정으로 신뢰하기에.
그러고보면 테일러 함장은 누구보다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자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고 했던가. 대통령선거가 눈앞에 닥친 현실에서 <캡틴 테일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매니아엔터테인먼트는 <캡틴 테일러> 26부작을 7장의 DVD로 출시할 예정이며 그중 네장이 최근 출시됐다( www.mania-ent.com/tylor). 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