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친구>, 두 가지 시선, 네가지 의문...지지론
2001-04-13

아픈 시절, 아름다운 녀석들

■<친구> 지지론 "영혼의 지문이 묻어

있는 깡패영화"

김소희 | 영화평론가

영화 <친구>를 시사회에서 처음 보고난 뒤 몇개의 별점을 매기면 좋을지 이틀 동안이나 생각을 했었다. 결국 명백히

예상되는 흥행 돌풍을 앞두고, 이 영화가 성취한 바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낮은 별점 쪽을 택한 적이 있다. “이 영화가

성취한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을 때, 열개의 스크린 가운데 네개를 차지한 <친구>는 심야였음에도 불구하고

완전 매진을 기록중이었다. 별수 없이 꼬박 두 시간을 기다리게 된 나는 가방 속에 들어 있던 동화책을 꺼내들었다. 어린 소녀의 동정어린 눈으로

고단했던 사람들의 역사를 그려낸 <북경 이야기>인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날의 소녀를 묘사한 대목에 이르러 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었다. 작가는 자전적인 이 동화의 끄트머리에다 “한 사람의 인생을 단락지어 몇개로 나눌 수 있다면, 아버지의 죽음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락이었다”고 적었다.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모두가 ‘고아’였던 시대

영화 <친구>의 주인공들에게도 아버지가 없다. 육친이나 스승, 조직의 보스 할 것 없이 여기 나오는 모든 아버지들은 무관심하거나

폭력적이거나 무기력하거나 음험하거나 부패해 있으며 기껏해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정도다. 네 친구의 인생길이 갈라지는 것도 각각의 아버지들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작가·감독의 머리 속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버지의 존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락”이라고 제시한

셈이다.

준석(유오성)은 부친의 장례식장에서 “내는 이제 고아다”라고 툭 내뱉는다. 이같은 ‘고아 의식’은 주인공 세대의 한국인들에게

공통적인 것 같다. 군사독재 정권 시대를 살던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의 이미지는 부패와 폭력, 타락과 비겁함으로 비추어졌다. 아버지 세대를 부인하고

자신들의 길을 독립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했으며, 따라서 이들 세대의 자아 이미지는 외롭고 비장한 것이었다. 아버지·기존 질서로부터

존재의 안정감을 얻지 못한 때문일까, 의리라는 횡적인 연대의식에 집착하는 것도 유난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주인공들이 스스로 성인이 되자 ‘친구’관계 역시 ‘아버지’만큼이나 허약하고 무의미해진다. 동수(장동건)는 우정을 팽개친 채 질주하다가

칼을 맞아 죽고, 준석은 동수의 죽음을 끝내 막지 못한다. “수영선수 조오련하고 바다거북이하고 헤엄을 치믄 누가 이기겠노”라는 난센스 퀴즈는

영화 속에서 세번이나 반복되면서, 우정을 목숨처럼 여겼던 이들이 맞이한 삶의 아이러니와 무상감을 대변한다.

이 영화가 군사독재에 종지부를 찍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여기 묘사된 깡패세계의 원리가 현대사회의 일반적인 생존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경쟁자를 다루는 법, 자기 절제와 성실성, 직업상의 전문 기술을 설파하며 건설업과 원양어업

등에서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하다. 깡패세계를 빌려 자본주의 사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갱스터 장르의 무기를 앞세우면서도, <친구>는

유년기적 조화에의 그리움이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비극적 동화이기도 한 것이다.

시스템, 배우, 드라마의 조화로운 앙상블

흥행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친구>를 비롯해서 최근 몇년 사이에 거듭 흥행작들을 만들어내는 힘은, 감독을 중심으로 한 특정 개인이나

남북관계를 비롯한 외적인 행운에 국한되기보다는 한국 상업영화 시스템의 전반적인 활력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자본- 제작- 배급-

유통 등 영화산업의 수직 체계가 자리를 잡고, 각 영역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의 돈과 인력, 테크놀로지, 경험이 축적되었으며,

부산이 제2의 영화 중심지로 떠오르는 등 공간적인 확대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배급 윈도가 해외로까지 확장된 데서 오는 자신감이 대작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유도하고 있다. 특히 유통 환경이 멀티플렉스 중심으로 급격히 개편되면서 완성도 있는 대작의 경우 흥행 안전성은 오히려 높아졌다.

스크린 수를 최대로 열고 마케팅을 집중시키면 비용이 효과적으로 회수되기 때문이다.

<친구>의 성공 요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배우의 힘이다. 이 영화에는 자기 캐릭터를 완성한 배우와 캐릭터 변신에 성공한

배우가 있다. 십여년 전쯤 일간지 연극 면에서 재능있는 신인 배우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접하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 무대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연극은 어설펐고 배우의 연기는 과장돼 있었지만, 넘치는 에너지로 무대 위를 팡팡 뛰어다니던 그 배우의 모습만은 뚜렷이 기억난다. 지금 <친구>에서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클로즈업을 당당하게 감당하고 있는 유오성이 바로 그다.

깎아놓은 밤톨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인해 오히려 콤플렉스가 심했던 장동건은 자신의 장점에 안주하지 않고 기꺼이 도전을 감내했던 대가로 이제 한명의

당당한 배우가 된 것 같다. 이 영화에서는 목소리 변신이라는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곽경택 감독은 용병술뿐만 아니라 두 캐릭터의 관계를 용의주도하게 드라마화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부산 시내를 줄달음치는 네 친구의 모습이나 상갓집에서

동수가 사라진 어두운 골목을 지켜보는 시선도 감독의 서로 다른 감수성을 대변해준다. 오프닝 크레디트가 뜨고 사라지는 방식도 제작진의 섬세한

정성이 담겨 있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친구>의 영어 제목은 ‘Memory Island’라고 한다. 기억 속에 드문드문 섬처럼 남아 있는 유년의 추억 속에서 그 친구들의

우정은 완벽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타이어 고무에 매달린 채 먼 바다로 수영을 나왔던 네 꼬마 중에 누군가가 말한다.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이제 돌아가자.” 앞서 말한 동화책의 작가는 유년의 즐거움이야말로 에누리 없이 완벽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완벽함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런 상념 때문이었는지 <친구>를 보는 동안 <동동의 여름방학> 같은 후샤오시엔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왜 <친구>에게

높은 별점을 주기를 망설였는지도 아울러 생각났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 살랑거리는 나뭇잎과 그 사이로 비쳐오는 햇살에다 대만의 역사 속에서 가녀린

숨을 내쉬었던 사람들의 애틋한 삶을 새겨 넣었던 후샤오시엔의 극도로 예민하고 지적이고 아름다운 영화 세계를 그리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기대는 쉽게 채워지기 어려운 비평가의 공상인지도 모른다. 마치 후샤오시엔에게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해보라고 얼러대는 것만큼이나. 생경하거나

개그맨 같거나 그도 아니면 거룩한 희생양처럼 ‘후까시’를 잡는 깡패가 아니라, 그 얼굴에 영혼의 지문이 묻어 있는 아픈 인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먼저 눈을 돌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친구>를 언급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는 이 영화가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가지고 정면 승부를 한다는 점이다. 죽음과 패배를 비장미

넘치게 강조함으로써 남성 신파의 경지에 이른 이 영화에 대해 부산 정서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애초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늘날 그 지역에 넘쳐흐르는

어떤 종류의 예민한 사회심리와 영합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슬며시 떠오른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본래 의도한 것은 ‘지역주의’가 아니라,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간 준석이 그 이유를 “쪽팔려서” 라는 한 마디로 설명했을 때의 그 미묘한 ‘지역성’을 담아내는 것이었고 이는 한국영화의 지평을

확장한 성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라면을 끓여 영화 속의 어떤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냄비 뚜껑에 받쳐 들고 후루룩거리며 먹었다.

▶ <친구>

비판론 - 맹목적 우정, 눈먼 신화

▶ <친구>를

둘러싼 4가지 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