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생 송승환은 여전히 청년처럼 보였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염색한 머리 사이로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보여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젊은이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세대에겐 배우로 어떤 세대에겐 <난타>의 제작자로 더욱 익숙한 그가 최근에 영화제작을 시작했다. 96년 고등학교 동창과 1억5천만원씩 투자해 총 3억원의 자본금으로 시작한 회사 PMC프로덕션의 첫 영화 <굳세어라 금순아>는 따뜻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코미디영화다.
낮이면 청와대가 한눈에 보인다는 광화문의 전망좋은 사무실. 세종문화회관 뒤켠 야외무대에서 흘러나오는 <홀리데이>가 배경음악처럼 흐릿가운데 만난 이날의 인터뷰이는 과연 ‘홀리데이’가 있을지 궁금할 만큼 바쁜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사의 이름 속에 ‘공연과 음악과 영화’를 다 움켜쥐고 있는 그에게서 떠오릿단어는 정작 ‘욕심’보다는 ‘여유’였다.
첫 영화의 개봉이 얼마남지 않았다. 만족스럽게 나왔나.
→ 감독이건 배우건 제작자건 영화 끝내놓고 100% 만족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연극제작을 많이 해봐서 아는데, 끝나고 무대 뒤로 인사와서 “수고했어, 애썼어…” 하면 그건 별로 재미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번그런 인사보다는 “재밌는데” 하는 말을 훨씬 많이 들었다. 아쉬운 점이 왜 없겠냐만은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편이다. 일반시사회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는 점도 안심이 되고.
단독제작이 아니고 아인스필름과 공동제작했다.
→ 원래 아인스필름 서준원 대표와 현남섭 감독이 가지고 있던 기획이었고 시나리오였다. 현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나는 영화제작이 처음이라 현장경험이 부족한 상태였고 서준원 대표는 노하우를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결국 파이낸싱이나 캐스팅 때문에 고전하는 부분을 PMC에서 맡아서 진행하는 식으로 공동제작하게 되었다.
시나리오의 어떤 점에 끌렸나.
→ 96년에 PMC(퍼포먼스, 뮤직, 시네마)프로덕션이라는 이름을 걸고 회사를 차렸을 부터 이미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많이 봤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런데 <굳세어라 금순아>는 시추에이션이 재미있었고 코미디가 억지스럽지 않게 잘 풀리는 데다가, 무엇보다 금순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이었다. 늘 재밌는 이야기보다는 재미있는 캐릭터에 더 끌리는 편인데 이 시나리오가 그랬다.
말한 대로, 영화를 보고 나면 배두나가 아닌 다른 배우를 금순이 역할에 대입시키기 힘들 정도다.
→ <고양이를 부탁해> 살리기 운동에 적극 나섰던 조영남씨가 한번은 배두나를 보고 ‘젊었을 적 윤여정 같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예쁜 여배우들이 판칠때 김기영 감독의 <화녀>에 등장했던 윤여정은 너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고, 배두나가 꼭 그랬다. 이 영화를 제작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캐스팅 1순위가 배두나였다. 배두나가 아니면 이 영화는 안 됐다고 했을 정도다. <플란다스의 개> 와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면서 참 매력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영화에 코미디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캐스팅했다면 아주 상투적인 연기를 했을는지도 모른다. 연기보다는 배우의 매력을 봤다.
조금 파격적인 개런티였다.
→ 2억5천만원이었다. 그렇지만 혼자서 많은 부분을 이끌어가야 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다른 영화에서 남녀 배우 나누어 줄 것을 몰아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신생영화사이기 때문에 파이낸싱 전에 캐스팅을 확정시켜놓아야겠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배두나란 든든한 배우가 있었기 때문에 이후 일진행도 순조로웠던 부분이 있다. 물론 총제작비 22억원에 적지 않은 개런티였지만 아깝지 않은 돈이었다.
현남섭 감독이 영화아카데미 4기 출신인데 시나리오 작업을 제외하면 입봉이 늦었다. 젊고 밝은 코미디인데 다소 고령에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감독이란 불안함은 없없나.
→ 적어도 예술하는 사람들에겐 나이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본인이 쓴 시나리오라는 점에서 안심이 되었다. 영화를 보면 그런 것들이 기우라는 것을 알 거다. 하지만 혹시 하는 마음이 왜 없었겠나. 그래서 촬영감독 자리에 젊고 배두나와도 이미 資맞추었던 최영환 기사를 앉혔다. 현 감독과는 거의 트러블이 없이 순조롭게 일했다. 물론 편집실에서 몇몇 늘어지는 장면에 대해 약의견충돌이 있었지만 믹싱을 마치고 보니 별로 대세에 지장없겠다 싶어 감독 의견에 따랐다. 영화는 결국 감독 예술이니까.
촬영장에 자주 나가 있었다고 들었다.
→ 자주 나편이다. 하지만 감독이나 스탭들 부담줄 정도는 아니었고, 부담 줄 목적도 아니었다. 나 역시 첫 영화다보니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거다. 현장에 나가 있으면 구체적인 돈의 흐름도 보이고 배우는 점도 많다.
오랫동안 연극제작과 공연제작만 해왔다. 첫 영화제작을 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 영화나 연극이나 근본적으로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려서부터 영화를 했고 촬영장이 익숙한 사람이다. 현장에서 조명조수, 카메라조수 형들과 어울리고 필름 갈아끼우는 것 구경하면서 컸고 영화출연하면서 자랐다.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제작자로서 현장에 가니 예전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이 보였다. 조금 절실하게 느낀 건, 한국영화판이 각 분야 감독들의 수준은 높아졌을는지 몰라도 그 아래서 일하는 세컨드, 서드 등의 인력의 인프라는 여전히 약하다는 점이었다. 제작자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 하나가 다 제작비와 직결되는 건데 말이다. 다행인 건 공동제작을 했고 노련한 파트너가 있었기 때문에 처음이라면 겪었을 수많은 시행착오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첫 고사 지낼 때 현장에 나보다 나이많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던 것만 빼면(웃음) 힘든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역부터 TV, 연극, 영화계에 몸담았다. 어떻게 이 일들을 시작하게 되었나.
→ 65년에 ‘어린이 이야기 대회’나가서 1등을 했는데 방송사 아저씨가 <은방울과 차돌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차돌이 역할을 하라고 해서 처음 성우일을 했다. 그러다 TV방송사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찍었고 드라마 나오는 배우들이 연극이나 영화를 하는데 ‘아역이 필요한데 해볼래’ 하다보니 연극도 하게 되고 영화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지금도 장맙대한 낯섦이 없는 건 바로 그 때문인 것 같다. 원래 한우물 파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자장면도 먹고 볶음밥도 먹고 된장국도 먹어야지 어떻게 한 음식만 먹나. 공연 때문에 골치 아프다가 영화 생각하면 뭔가 머리가 뚫리는 것 같고 영화 생각하다 막히면 출연하는 드라마 생각한다. 그게 좋다.
최근 <아줌마> <고백> <내 사랑 누굴까> 등의 드라마에 얼굴을 비치기까지 한참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만날 수 없었다.
→ 86년에 극단 ‘환퍼포먼스’로 시작했던 일을 96년 기업화시킨 것이 PMC프로덕션이었다. <난타>는 그 4번째 작품이었는데 해외 시장 개척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선례도 없었고 방법도 모릿시절,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해외 시장에 나갔다. 해외 프로모터가 누군지, 얼마에 팔아야 하는지, 계약서를 어떻게 쓰는지도 몰랐다. 파리, 뉴욕, LA를 비디오테이프 들고 동분서주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러다가 99년에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호평받으면서 ‘브로드웨이아시아’라는 에이전시를 만났고 결국 브로드웨이까지 가게 되었다. <목욕탕집 남자들> 끝나고 <아줌마> 찍기까지가 바로 그 시기였다. 매일 외국으로 도는데 드라마 찍기란 불가능했으니까 시청자들 눈에는 한참은 쉰 것처럼 보였을 거다.
<굳세어라 금순아> 이후 다음 영화는 준비 중인가.
→ 두편이 있는데 모두 원작이 희곡인 영화들이다. 1편은 시나리오 3고쯤 나온 상태이고 1편은 시나리오 시작단계다. <굳세어라…>를 거쳤으니 이번단독, 자체제작이 될 거다.
그외 공연준비는.
→ 30, 40대들이 즐길 수 있는 창작뮤지컬을 준비 중이다. 그래서 요즘이문세, 김수철 등과 만나고 다닌다. 개인적으로는 96년 <유리동물원>을 마지막으로 못했던 연극을 내년 봄에 한편 할 생각이다. <굳세어라…>에서 시아버지 역할로 나오는 김길선생의 칠순기념 공연으로 올리는 <아마데우스>다. 예전에 김 선생님이 공연 2주 전에 몸이 안 좋아지신 관계로 살리에리 역을 포기하신 일이 있었다. 꼭 다시 해보고 싶어하셨다. 나는 다시 모차차르트로 나올 거다. 그전까지 이 뱃살을 빼야 한다. 배나온 모차르트가 될 순 없으니까. (웃음)
궁극적으로 영화감독이 꿈이라고 들었다.
→ 제일 힘든 일이고, 제일 어려운 일이고, 제일 하고 싶은 일이 영화감독이다. 그래서 제일 마지막으로 남겨둘 거다. 영화감독 안 한다고 야단칠 사람도 없고 내일 모레가 오십인데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든다고 못할 일 같지도 않다. 배우는 태생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지만 감독은 다릿 디렉팅만큼 재밌는 게 없을 듯 싶다. SF영화나 액션영화는 안 만들 거 같고 멜로나 드라마를 만들게 되지 않을까.
한 사람이 하기 너무 많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셈이다. 다소 워커홀릭 기질이 있는 것 같다.
→ 사실 이 모든 것을 일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아침에 회사 나오는 게 늘 재밌다. 지금까지 살면서 모든 판단 기준이 재미있느냐 없느냐였다. 어릴 때도 방송사 가는 게 학교 가는 것보다 재밌었으니까 갔고 <난타>도 재밌을 것 같아서 시작했다. 돈이 될까 싶어서 시작한 건 하나도 없었다. 하다보니 돈이 들어오더라. 쉬고 싶으면 쉬고 놀고 싶으면 논다. 일 없다고 불안해하고 그런 건 없다. 그냥 일 없으면 재미없으니까 일한다. 그렇게 보면 워커홀릭은 아니지 않나글 백은하 [email protected] / 사진 이혜정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