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샤오시엔으로 대표되는 대만영화의 경이로움은 새로운 형식뿐 아니라 동시대의 삶에 대한 지극히 성찰적인 태도에 있다. 왜 사는가, 왜 영화를
만드는가에 대한 질문을 잊지 않는 근본주의적 태도는 이번에 초청된 대만 여성감독 3인의 영화 세편에서도 발견된다. 봉건성과 근대성이 공존하는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무겁게 질문하는 영화들인 것이다. 흥미로운 건 세 영화가 모두 붕괴된 가족이란 모티브에서 출발한다는
점.
비비안 창의 <금지된 속삭임>(2000년, 98분)은 세
에피소드를 <숏컷>식으로 배치해, 불구화한 가족의 상처를 세대별로 탐색한다. 사고로 다리를 잃은 남편이 어린 딸과 구걸을 나간다. 어렵게 번
쥐꼬리만한 돈으로 불구의 사내는 매일 도박장에 나간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서 어둠뿐인 생을 사는 아내는 다른 남자를 불러들여 쾌락에
절망적으로 탐닉한다. 어린 딸에게 출구는 환상뿐이다. <구멍>의 조감독을 지낸 비비안 창은 <구멍>에서처럼 빛의 난무 속에 부부가 춤추는 환상으로
시궁창 같은 삶을 어루만진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선 불구의 아버지조차 없다. 책 대여점 종업원인 20대 딸은 홀어머니와 마음의 문을 닫고 산다.
그녀의 취미는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으로 살아가는 것. 그녀에게 기억상실증 남자가 다가온다. 자기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여인과 기억 회복을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남자의 만남은 그러나 너무 짧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과년한 딸은 엄마가 재혼한 뒤 아예 집을 나와 남자들의 집을
전전한다. 그러나 머무를 곳이 없다. 입원해 죽어가는 엄마의 병실이 최후의 거처. 그녀는 숨을 막 거둔 엄마 옆에서 신음처럼 말한다. “나,
임신했어.” 어떤 위안도 없는 세상에서, 징그럽지만 또다른 생명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차이밍량의 영향이 짙게 감지되지만, 섬세한 심리 묘사와
느리지만 정련된 카메라워크와 편집은 감독의 연출 역량이 수준급임을 말해준다.
황위샹의 <진정광애>(1999년, 105분)는 훨씬 거칠고
과격한 어조로 무너진 가족에서 이탈한 여성의 파멸기를 그린다. 엄마가 재혼한 뒤 샤오란은 술과 남자 그리고 마약을 벗삼는다. 우연히 가까워진
친구가 잠깐의 위안이 되지만, 곧이은 친구의 자살은 샤오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가출한 뒤 호스티스와 창녀로 변해가고 마약은 점점
강도를 높여간다. 신부 수업을 받는 기품있는 청년이 다가와서 결혼까지 하지만, 그녀를 구원하긴 역부족. 샤오란에겐 끝없는 자기파괴와 죽음만이
기다린다. 세밀한 심리 묘사 대신 절망의 제스처가 너무 앞서나오는 게 흠.
첸루어페이의 <세상끝에서>(2000년,
60분)는 아주 담백하고 정갈한 톤으로 사랑을 잃고 떠도는 두 레즈비언의 짧은 만남을 그린다. 연인을 떠나보낸 뒤 오랫동안 그림에 생의 에너지를
쏟는 화가 시안에게, 젊고 분방하지만 역시 실연의 상처로 아픈 칭이 다가온다.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조금씩 알아가며 애정이 싹트는 과정이
영화의 전부지만, 뛰어난 연기와 정감있는 화면은 두 여인의 비애를 무겁게 전해준다. 그리고 그 비애의 밑바닥엔 잃어버린 가족적 유대에 대한
아스라한 동경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허문영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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