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는 깡패영화다. 소독차가 뿜어대는 모기약 안개 속을 좋아라 쫓아달리던 아이들이 어떤 길을 따라서 조폭이 되나를 밀착 취재한 한국판 갱영화다. 미국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감독은 성장기를 공유하는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심중에서 꺼내 스크린에 펼쳤다. 소년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대체로 향수가 묻어 있게 마련.
그 아련함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은 있다. ‘건달’과 장의사의 아들들은 주먹을 팔고, 중산층의 아들들은 대학에 간다. 선택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진정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 모를까. 그래서 일찍이 주인공은 가출하자고 쫓아온 모범생 친구에게 니는 니처럼 살아라, 나는 내처럼 사께, 라고 말한다. 학교는 기회를 분배하는 곳이 아니다. 너는 너처럼 살고, 얘는 얘처럼 살도록 금그어주는 것, <친구>가 보여주는 학교는 그렇다. 어쩌겠는가. 곽경택 감독은 실화라고 말한다.
그런 세상조차 먼저 익힌 주인공 친구는 근력으로 치자면 한참 하수인 친구에게 내가 늙어 건달짓 못하게 되면 찾아가도 박대말라고 부탁을 한다.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여자친구도 단짝 주먹친구가 아닌 우등생 친구에게 소개시켜 준다. 세상이 어떤 축을 중심으로 돌게 될 것인가를 그 소년들은 본능적으로 감지한 셈인데, 주먹친구는 그것이 고까웠을 것이다. 니는 왜 상택이한테 그러나. 친구 아이가. 그럼 내는. 내는 시다바리가? 갈등의 씨앗을 머금은 이런 대사도 그래서 태어났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자연주의적 묘사만으로도 한무리 소년들을 삼키고 뱉는 세상, 또는 사회의 속성을 선명하게 포착해낸다. 주먹세계 안에서도 다시 갈라지고, 등돌린 조직의 이해에 따라 서로를 사냥하는 인물들은 또 씁쓸하고 왜소해보인다. 알다시피, 화자는 그들의 세계 밖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들을 들여다보는 지식인 친구이기 때문이다. 조직의 중간 수령쯤으로 ‘승진’한 친구의 세 자랑에, 그래봤자 깡패 아니냐고 말하던 ‘나’말이다.
영화 <친구>의 미덕은 사실, 주인공이 주문처럼 외워대는 ‘의리’, 또는 ‘우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이데올로기로서의 우정과 친구를 신봉하면서도, 실체로서의 친구를 배반하게 만드는 관계, 추억을 공유했으되 현재의 조건은 공유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따위의 현실 속에 있다. 그런데 <친구>는 또다시 친구의 이름으로 모든 갈등을 봉합하려 한다. 그것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