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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시절, 선구자의 목소리
2001-04-04

한국 사이키델릭 록 음악의 불우한 디바, 김정미

<김정미>/ 지구레코드 발매

재발매 문화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이 땅의 음반시장 현실에서 70년대 초중반을 불우하게 수놓은 신중현 사단의 사이키델릭 보컬리스트

김정미의 이번 복각판은 진지한 우리 노래의 추적자들에게 가슴 뻐근한 하나의 선물이 될 것이다.

김정미의 LP 음반은 최근 2∼3년간 급격히 일기 시작한 아날로그 음반 수집 붐 이전에도 이른바 ‘컬렉터즈 아이템’으로 귀한 대접을 받아

왔다. 13장에 이르는 그녀의 음반 목록 중에서 <`Now`>와 <바람> 같은 앨범은 100만원을 전후한 가격에서 거래될 정도이니(그 가격은

70년대 신중현 사단의 음악을 선호하는 일본 수집가들이 대폭 올려 놓았다고들 하지만), ‘사이키델릭’이라는 한국 록 음악의 하위 장르를

개척한, 그러나 펄 시스터즈나 김추자와 같은 신 사단의 여늬 보컬리스트들과는 달리 성공의 당의라곤 맛본 적도 없는 김정미는 근 30년이

흘러서야 자신의 명예를 보상받고 있는 셈이다.

지구레코드에서 발매한 이 음반은 74년과 77년에 발표한 두장의 음반 중 김정미의 트랙들만 추린 것이다. 신중현의 몽환적인 일렉트릭 기타와

아스라히 사라져가는 듯한 김정미의 독특한 보컬 톤이 새로운 음악사의 페이지를 연 그 이전의 음반들에 비해 함량이 조금 미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중현 작곡본인 전반의 일곱 트랙만으로도 선구적인 두 뮤지션의 지음(知音)을 만끽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느껴지지 않는 모음집이다.

서두를 여는 <이건 너무하잖아요>는 김정미의 노래 중 그래도 당시의 대중에게 알려졌던 ‘시장의’ 대표곡이며 드라마 주제가로도 알려졌던 <갈대>는

김정미 특유의 허무한 성적 환상이 하늘하늘 피어오른다. 특히 네 번째 트랙에 자리하고 있는 <담배꽁초>의 자유분방한 발상법은 몇번이고 반복

재생 버튼을 누르게 만든다.

70년대 초중반은 한국 대중음악사가 맞이한 첫 번째 르네상스 시대였다. 모든 것이 절대빈곤에서 허덕였지만 형형한 눈빛과 독자적인 개성으로

무장한 음악가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우리 대중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타전했다.

이 음반만으로도 한국 록 음악의 영원한 아버지 신중현의 위대한 권능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힘들지 않다. 그가 프로듀스한 노래들과 후반부의

대표적인 트로트 작곡가 김영광의 트랙들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도전적인 문제의식과 그 자리에 머물려는 스테레오 타입의 상상력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 불타오르는 예술적 열망은 박정희 유신 정권의 군홧발 아래서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으로선 아무런 시장성도 없을 수 있는 이런 음반을 재발매한 지구레코드에 조용한 박수를 보낸다. 이 앨범은 이 음반사가

6년쯤 전에 복각했던 신중현과 엽전들의 세장의 음반 이래 하나의 작은 쾌거이며, 세대별로 단절적인 음악문화 패턴을 재생산하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이다.

이 음반을 촉매제로 하여 신중현의 영원한 걸작인 <아름다운 강산>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은 명앨범 <바람>과 신중현/김정미 콤비의 대표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now`> 앨범까지 가난한 우리 노래 애호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