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펀한 남해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밀애> 촬영장은 동유럽의 어딘가를 뚝 떼어다놓은 것 같다. 젊은 한국 촬영감독 옆에 외국 할아버지 한 사람이 포커스를 맞추고 주변에는 푸른 눈의 남자들이 조명을 설치하고 옮긴다. 이들은 바로 <밀애>의 촬영을 위해 폴란드에서 날아온 촬영스탭 5인방. 8월30일 새벽에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사진촬영을 위해 모두 까만색 T셔츠를 정성스럽게 맞춰입고 나타난 그들은 통역할 틈도 주지 않으며 2시간의 혼빼놓는 폴란드산 수다를 줄줄이 비엔나 식으로 풀어놓았다.
<밀애>의 촬영감독이자 폴란드 우츠영화학교 출신의 권혁준 촬영감독과 이들은 2년 전 폴란드의 한 선술집에서 처음 만났다. 권 감독의 단편 편집을, 이번에 조명팀으로 참여한 야누시의 친구가 해주었던 인연으로 금세 친해진 이들에게 권 감독은 “한국에 와서 같이 일하지 않겠냐”라는 프로포즈를 했고 “기분 좋은 한국 친구” 때문에 평균 경력 22년의 이들은 난생 처음 아시아땅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DP 시스템 아래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포지션을 굳이 구분하자면 조명팀의 야누시, 안제이, 요제프와 촬영팀의 로베르토와 즈비섹으로 나눌 수 있다. 다부진 인상의 야누시 라멘트는 DP 시스템에서 조명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 개퍼. “조명에 따라 인물과 상황이 이렇게 다른 느낌을 주다니….” 우연히 들른 영화제작소에서 본 조명에 대한 매력에 이 일을 시작했다는 그는 그 매력에 빠져 벌써 25년째 개퍼로 활동하고 있다. 모자를 쓴 안제이 케우바시인스키는 조명그립. “군대에서 제대하고나니 다시 공부하기 위해 학교에 간다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우연히 국립영화제작소에 발길이 닿아 18년째 일하고 있다”고. 또 한명의 조명그립인 요제프 체풀루하는 73년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 영화판에서 즈비섹을 만난 그는 영화교육과 조명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배웠고 이후 야누시, 안제이와 팀을 이루어 함께 작업하고 있다. 로베르토 우코우프스키는 이들 중 가장 젊어 보이지만 그 역시 16년째 카메라 돌리를 민 베테랑. 원래 대학에서는 사진을 전공했고 현상소에서 일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영화스틸을 찍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촬영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산타할아버지 같은 인상의 즈비섹 본칙은 포커스 조정을 담당하는 포커스 플러. 그의 놀라운 전직은 초등학교 산수선생님이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실연의 아픔을 달래준 동료선생님의 남편이 영화일을 하고 있어서”라는 특이한 입문기를 가진 그는 벌써 30년 동안 포커스를 맞추었다. 유난히 이동이 많은 <밀애>의 정사신에서도 ‘포커스 한번 나간 적이 없다’는 것이 다른 스탭들의 귀띔.
촬영현장에서 폴란드어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권 감독과 우츠영화학교 학생이자 촬영 전반을 어시스트해준 오승환씨를 포함해 단 3명뿐이었다. “좀 불편했지만 촬영쪽 일이 그렇게 말이 많이 필요한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갈수록 말없이 서로를 이해해주는 편이었다.” 사실 4개월간의 한국생활에서 이들이 불편을 느낀 것은 언어소통보다 오히려 음식이었다. “처음엔 이국적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는데, 계속 먹기는 좀 힘들었다.” 이때 가장 건장한 즈비섹이 “못먹어서 살도 많이 빠졌다”고 농담을 해댄다. “그래서 전기프라이팬을 사서 고기랑 감자, 양파, 참치캔 같은 걸 사다달라고 해서 촬영장 한편에서 요리를 해먹었다. 나중엔 한국 스탭들까지 우리 밥이 맛있다고 숟가락을 들이댈 정도였는걸.” 한국에 가장 잘 적응해서 한국말 공부도 열심히 했다는 로베르토는 “남해의 해산물, 특히 해물탕은 정말 맛있다”고 거든다.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내 한쪽 발은 이미 폴란드에 가 있다”고 담배를 뻐끔뻐끔 펴대던 향수 가득 찬 쓸쓸한 밤도 있었지만….
이들이 한국 영화현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스탭들이 서로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엔 자기 일만 하는 데 비해 여기는 자기 영역이 아니더라도 서로 도와주고 함께 짊어지려고 한다. 그 모습은 참 감동적이었다. 물론 가끔은 서로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독특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폴란드에서는 1년에 제작되는 자국영화가 채 15편이 안 된다. 원래 국가지원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한때 1년에 40, 50편이 제작되던 때도 있었지만, 국영TV가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되고 2년 전 그나마 TV쪽에서도 손을 놓으면서 영화제작자들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영화를 어떻게 만들지? 어디 가서 스폰서를 찾는 거지?” 게다가 자본주의의 도래와 함께 할리우드영화에 많은 관객이 몰리는 상황에서 영화산업에 투자할 만한 사람들이 선뜻 나서지 않기도 했다. 요즘엔 영화작업뿐 아니라 광고일도 해야 하는 형편이고 그나마 광고일도 점점 줄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유쾌하기만 한 이들 5인방은 “좋아질 거라는 희망은 잃지 않는다”고 입모아 말한다.
얼마 뒤 권혁준 감독은 우츠영화학교 졸업작품이기도 한 <밀애>의 프린트를 품에 안고 폴란드로 날아갈 예정이다. 그곳에서 이 패거리들은 그들만의 조촐한 상영회와 함께 파티를 열 것이다. 다시 작업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하는 우문에 “우리는 이미 동료를 떠나 친구다. 친구란 친구가 부른다면 언제라도 달려오는 게 아닌가?”라고 현답을 내어놓는 이들. 왁자지껄 사라지는 이들의 뒷걸음에 인사를 건넨다. 도 비제니아!(do widzenia), 다시 만날 때까지. 글 백은하 [email protected]·사진 정진환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