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아카데미상은 영화인들의 일종의 디너파티로 시작됐다. 그러나 이 화기애애한 디너파티 뒤에는 1920년대 급성장한
할리우드의 대중적 영향력에 견제 움직임을 보였던 정치권과 교육계, 교회에 대항해 영화인들이 이익과 자율성을 보호하고 자기혁신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공격적 수비’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1929년 할리우드 루스벨트호텔에서 열린 첫 시상식에는 250명의 할리우드 ‘엘리트’들이 10달러씩의
회비를 내고 참석해 15개 부문의 상을 수여했고 수상 결과는 미리 각 신문사에 보도자료로 배포됐다. 이 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고조되자
이듬해 라디오가 중계에 나섰고, 지금과 같은 극장식 쇼 포맷의 행사는 1943년에 처음 꼴을 갖추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오늘날처럼 주목도
높은 쇼 엔터테인먼트로 만든 TV 중계가 시작된 것은 1953년. 가 중계한 그 해 행사에서 초대 사회는 밥 호프가 맡았다. 15개
부문으로 출발한 시상 부문은 영화 테크놀로지의 영역이 분화됨에 따라 증가했다. 예컨대 조연상은 1936년부터, 특수효과 부문은 1939년부터
신설됐으며, 외국어영화상은 1947년부터 트로피를 시상했다.
스튜디오와 영화인 개인에게 부여되는 명예와 신용도라는 보이지 않는 부가가치를 차치하더라도 오스카상의 경제적 효과는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
작품상의 추가 흥행수입은 평균 2880만달러로 추산되며 여기에 오스카 마크가 갖다줄 비디오와 DVD 세일즈, 그리고 자료로 아카데미 수상작을
구매할 미국 및 해외 도서관의 숫자만 꼽아보아도 스튜디오들이 오스카 캠페인에 수백만달러를 쏟아붓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오스카상은 배우,
기술 스탭 등이 망라된 영화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로 승자를 결정하는 다수결 형태를 취한다. 각 스튜디오는 이들을 대상으로 재시사를
개최하고 비디오테이프나 DVD를 배포하며 홍보전을 전개한다. 특히 올해는 일간지 사설 대면광고, 제작자를 칭찬하는 스타의 멘트를 담은 특별
제작광고 등 백전노장의 PR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아이디어가 백출했다. 올해의 경우, 투표권을 가진 회원 수는 약 5700명. 아카데미에
따르면 이 가운데 80%가량이 실제로 표를 던진다고 한다. 직접 할리우드영화 생산에 가담하는 인구가 선정하는 상답게 오스카는 할리우드영화의
흐름과 나란한 궤도를 걸어왔다. 작품성보다 그때의 트렌드를 투명하게 반영하고, 영화산업과 시장에 대한 영향력이 기형적으로 비대해졌다는 사실도
할리우드와 오스카의 닮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