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CGV에서 <라이터를 켜라>를 봤다. 참으로 오랜만의 명동 나들이였다. 내 세대 서울 사람들이 흔히 그랬겠지만, 나도 10대 후반과 20대 전반의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흘려보냈다. 영세를 받기 직전에 이게 아니다 싶어 뛰쳐나오기는 했으나, 나는 길지 않았던 고등학교 시절 명동성당에서 교리학습을 하기도 했다. 그때 내가 고분고분한 아이였다면, 지금 그레고리오라는 본명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천장이 온통 거울이었던 ‘우주시대’라는 카페와 비발디의 <사계>가 지겹게 흘러나오던 ‘하늘소’라는 찻집에서 나는 덜 익어 새큼달큼한 밀어를 한 여자와 나누곤 했다. 그 여자가 진탕 취해 코스모스백화점 앞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던 날, 나는 그녀와 더불어 한 생애를 감당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명동의 문화와 돈이 한강 이남으로 빠져나가면서 이 ‘밝은 동네’가 많이 퇴락한 듯싶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어느새 다시 살아난 듯하다. 명동은 내 20대 시절처럼 활기로 출렁이고 있었다. 라이터를 다시 켠 모양이다.
영화관을 나서며 얼핏 든 생각. 김승우씨와 차승원씨 가운데 어느 쪽 ‘몸값’이 더 비싼지는 모르겠으나, 촬영하며 치렀을 고생을 생각하면 김승우씨가 돈을 훨씬 더 받아야 옳다는 생각. 그러다가 문득 명성도 돈도 손에 쥐지 못하는 수많은 단역배우들에게 생각이 미치며 우울해졌다. 이어지는 생각들. 스물이 넘은 뒤로 오래 잊고 있었던, 한 시절의 내 ‘얼빵함’을 증명하는 생각들. 완벽하게 평등한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개체가 한 모체에서 복제되어 나오지 않은 다음에야(곰곰 생각해보면 사실은 그런 경우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진데), 그 개체들의 기능과 역할은 나뉠 수밖에 없고, 그 기능들과 역할들 사이에는 여가(與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서열이 생기게 마련일 거라는 생각. 존재는 곧 차이이고 모든 차이는, 서러워라, 부당하게도, 가치의 사다리를, 곧 서열을, 곧 차별을 만든다는 생각.
스크린에서 김지영씨를 만나 반가웠다. 나는 SBS 일요시트콤 <여고 시절>의 주책바가지 노인이 몇 개월 전 종영한 SBS 주말드라마 <화려한 시절>의 주책바가지 노인과 동일한 연기자라는 걸 아내가 깨우쳐주기 전까지는 몰랐다. 내가 과거 한 시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얼빵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김지영씨의 연기가 워낙 공교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라이터를 켜라>에서 김지영씨를 보고 나는 그녀의 연기력이 십분 살아날 포복절도할 장면을 은근히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그녀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10년쯤 전, 지금은 ‘원로’가 된 ‘중진’ 소설가 두분이 해외여행 중 런던의 한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기다리는데, 사근사근한 웨이트리스가 그분들께 뭐하시는 분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한분이 “우리는 작가(writers)요”라고 대답했는데, 실제 발음은 lighters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웨이트리스가 얼빵한 표정을 짓자, 다른 분이 writers라고 교정을 하며 lighters의 발설자께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그 두분은 그 이후 사이가 틀어져 지금도 왕래가 없다는 이야기. 믿거나 말거나. 한국어 화자가 lighter와 writer를 또렷이 구분하지 않는 게 허물이 될 건 없겠다. 사실 영어의 /r/ 음소나 프랑스어의 /R/ 음소는 우리말 /ㄹ/ 음소와 너무 다르기도 하고. 내 가까운 친구 가운데도 외래어를 발설할 때 이 두 /ㄹ/의 구분에 완전히 신경을 끄는 이가 있다. 아니, 신경을 완전히 끈다고 말하기도 뭐하다. 왜냐하면 이 친구의 발음은 뒤죽박죽이 아니라, 신기할 정도로, 거의 예외없이 거꾸로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인 ‘보드레르’와 사회학자 ‘보들리얄르’의 번역원고를 ‘(을)리라이팅’한 적도 있다. 친구여, 조롱이 아니라 정담(情談)이라는 거 알지?
중학교 영어시간에 배운, 성냥불 좀 빌리자는 뜻의 “May I trouble you for a match?”라는 표현을 나는 한번도 사용해보지 못했다. 중학교 때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담배를 배운 뒤에도 성냥을 빌릴 외국인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권 국가에 처음 가본 것이 지난해다. 중학교 때 배운 영어를 써먹을 기회가 생긴 셈인데, 문제는 이제 성냥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 “May I trouble you for a lighter?”라는 표현이 옳은지 좀 불안했다. 결국 현지인에게 물었더니, 이분 가로되 lighter라고 해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light라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 성냥불이든, 라이터불이든 light로 충분하다고. 그래서 그때부턴 자신있게, light, light를 외쳤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생긴 일. 호텔 로비에서 담배를 꺼냈는데, 주머니에 라이터가 없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아가씨에게 다가가 공손을 극(極)하여 “Would you give me a light, please?”라고 했더니, 이 아가씨 활짝 웃으며 브래지어(는 했을 테지) 속에 손을 집어넣어 라이터를 꺼내주는 거라. 놀란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그 순간 얼마나 애썼는지.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논설위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