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k, 1999년감독 앤드루 플레밍 출연 커스틴 던스트, 미셸 윌리엄스, 댄 헤다아, 윌 페렐, 브루스 매콜로 장르 코미디 (콜럼비아)
역사는 누가 움직이는 것일까. 시대를 앞서가는 영웅? 노도처럼 들고일어나 위아래를 바꿔버리는 민중? 사회를 이끄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 모두 아니다. <딕>은 모두가 우습게 보는(심지어 자신들조차) ‘멍청한 10대’가 역사를 바꾼다고 말한다. 자세히 들어보자. 닉슨을 물러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워터게이트 빌딩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하다가 경찰에 붙잡힌 한심한 하수인들도,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을 폭로한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들도, 대통령 주변의 무능한 측근들도 아니다. 그건 바로 평범한 15살의 소녀 베스티와 알린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우연히 목격한 베스티와 알린은 다음날 학교 행사로 백악관을 견학하게 된다. 전날 빌딩에서 만났던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자, 닉슨의 측근은 베스티와 알린을 심문하고 얼떨결에 닉슨까지 끼어든다. 닉슨은 소녀들을 사로잡기 위해 백악관 개 산책인으로 임명하고, 비리현장이 들통난 뒤에는 비밀 조언자라고 치켜세운다. 어느 날 비밀 녹음기를 발견한 두 소녀는 사랑을 고백하다가, 우연히 닉슨이 개를 혼내는 소리를 듣게 된다. 화가 난 베스티와 알린은 닉슨에 대한 애정을 철회하고 복수를 다짐하며 <워싱턴 포스트>에 전화를 건다.
베스티와 알린을 본 닉슨은 “저 나이에 우리 딸은 화장과 패션말고는 관심이 없었어”라고 말한다. 맞다. “우리를 멍청한 10대로 보는 거 아냐?”(알린) “우리 멍청한 10대 맞아.”(베스티) 닉슨이 야비하고 치사하다는 것을 안 베스티와 알린은 복수를 다짐한다. 그 출사표는 이렇다. “87년 전에 우리의 조상은… 하여튼 뭔가를 했어. 우리도 복수를 해야 해.” <딕>은 정색하고, 미국 역사의 추잡한 순간을 엽기적인 상상력으로 비틀어버린다. <대통령의 음모>를 기억하고 있다면, <딕>은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와 비아냥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유쾌한 농담이다. 베스티와 알린은 닉슨이 당부한 ‘비밀 엄수’를 절대로 지키지 않는다. 토론 시간에 자신있게 발표한다. “우린 대통령의 비밀 조언자이고, 개 조련사예요.” 완고한 여선생은 감히 그런 거짓말하지 말라며 정색을 하고 야단을 친다. 그러나 책상에 걸터앉은 히피풍의 흑인 선생은 아주 좋은 상상력이라고 칭찬한다. <딕>은 모든 권력과 권위주의에 대한 가볍고도 신랄한, ‘허무맹랑한’ 농담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래서 더 유쾌하다.김봉석/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