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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스틸이 영화가 제작중이라는 증거물이기도 했어”
2002-06-28

1948년 <유관순>부터, 100여편의 영화 스틸 찍은 작가 백영호

2000년 4월8일부터 15일까지 8일간에 걸쳐 열린 이탈리아영화제 IMMGINI DAL FESTIVAL(14회)을 찾은 관객은 색다른 전시회를 경험한다. 먼 나라 한국으로부터 왔다는 한 스틸작가의 전시회장, 그 나라의 먹거리인 무, 배추, 오이, 고추, 마늘 등이 놓여 있는 세트 가운데, 디자이너가 남대문에서 직접 공수했다는 고운 한지 위에 한국영화 스틸들이 차곡차곡 전시돼 있었다. 스틸 인생의 계기가 된 <유관순>(감독 윤봉춘, 1948), 한국 최초의 입체영화였던 <임꺽정>(감독 유현목, 1961)과 <몽녀>(감독 임권택, 1968),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인 <생명>(감독 이강천, 1958, 안양종합촬영소 1기생)을 비롯한 16개 작품 64컷의 스틸이 전시된 전시회장 안은 벽안의 관객으로 발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지난 5월28일 63빌딩 별관 코스모스홀에서는, 50여년간 한국영화의 스틸을 찍어온 백영호 선생의 팔순 잔치 및 기념 사진전이 열렸다. 그날은 지방선거를 위한 선거 사무소가 일제히 문을 연데다, 마침 칸영화제에서 돌아온 세명의 승전 노병을 위한 축하파티가 있던 날이어서 오랜 지기들만이 자리를 빛낸 조촐한 잔치였다. 심우섭 감독은 축하 인사말에서 “20년이 지난 뒤에도 백 선생의 사진전을 감상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희를 기념하는 사진전을 시작으로 10년간 꼬박 8번의 전시회를 가진 바지런한 백영호 선생을 향한 더없이 적절한 ‘칭찬’이자 ‘격려’였다. 48년 윤봉춘 감독의 <유관순> 촬영현장에서 카메라를 든 이후 지금껏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을 찍었으며, 한국영화인 최초로 유럽에서 한국영화 사진전을 연 바 있는 살아 있는 한국영화의 역사책, 백영호의 그 치열한 사진인생, 영화인생 속으로 들어가본다. 편집자-----

인터뷰를 할 때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바로 “스틸이란 무엇인가?”야. 요즘이야 영화가 개봉되기 훨씬 이전부터 영화의 줄거리와 배우 인터뷰, 대표적인 장면 등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소개되니까 포스터와 팸플릿이 중요한 대접을 받지 않지. 하지만 50년대 영화판에선 포스터와 전단지가 유일한 홍보수단이었어. 하나 더 들자면 극장에 붙이는 배우들 사진 정도였지. 홍보물이야 그 정도였지만, 스틸이 쓰이는 목적은 따로 있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명 감독과 유명 배우 이름이 박힌 시나리오 앞에선 투자자들이 앞다투어 돈을 내놓지만, 그렇지 않은 감독들은 투자를 받기가 곤란했어. 물론 시나리오가 탄탄하고, 중요 배우들을 골라 섭외해놓으면 투자를 받는 데 별 무리가 없었지만, 문제는 투자자들의 의심이었지. 실제로 영화 속에 그 배우가 등장하는지 크랭크인 일정에 맞춰 영화가 제작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받고자 했어. 따라서 현장 사진이 증거물로 채택되곤 했지. 영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촬영현장의 분위기와 주요 사건까지 담아내는 스틸을 통해 현장에 직접 오지 않고도 제작상황을 가감없이 전달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보니, 하루 일정이 끝나면, 다른 스탭들은 쉴 채비를 하는데, 스틸맨들은 부지런히 그날의 현장을 담은 사진을 현상해야 했어. 제작사와 투사사에 넘길 사진들이었지. 밤 늦게까지 가정집에 딸린 암실에서 사진과 한바탕 싸움을 하고 나면 희뿌옇게 날이 밝았지. 그럼 한숨도 못 자고 현장에 나가야 했고.

영양주사 맞으며 윤봉춘 감독의 <유관순> 찍어

스틸을 처음 찍은 작품은 윤봉춘 감독의 48년작 <유관순>이었지만, 내게 ‘이게 진짜 스틸이다’라고 느끼게 한 작품은, 수도영화사 안양종합촬영소 1기생인 이강천 감독이 만든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 <생명>(1958- 이 숫자는 실제 제작연도라기보단 검열을 통과한 연도라고 보는 것이 적당함. 편집자)이었어. 제목처럼 그 영화를 통해 스틸맨으로서의 생명을 얻었다면 말장난일까. 내겐 첫 영화 못지않은 감회를 안겨주었지. 실은 무척 고된 일정의 연속이었어. 그 영화 끝나고 한동안 ‘영화란 이렇게 힘이 드는 작업인가’하고 치를 떨기도 했으니까. 일주일간 잠자리 근처에도 못 가고 작업을 해댈 땐, 걱정이 된 감독이 나서서 영양주사를 맞춰 줄 정도였지.

그 일이 끝나고, 2기생들의 작품인 <낭만열차>(1959)를 찍을 땐 일이 너무 수월한 거야. 도대체 어떤 게 영화의 진짜 얼굴인지 분간이 안 가더라고. ‘그래, 그럼 어디 다시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에 3회 작품 <애정>(초기의 제목, 나중에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름. 을지극장 배급 검열까지 받음)과 4회 작품인 <지옥은 만원이다>에 연속으로 참여했어. 4회 작품이 끝나고, 이번엔 미 국무성에서 안양촬영소를 빌려 <고요한 한국의 아침>이라는 국방 홍보영화를 찍을 때 함께 작업을 했어. 그때 미국이 얼마나 세심하게 영화를 찍는지 놀란 사건이 하나 있었어. 크랭크업을 한 뒤 촬영단이 모두 미국으로 철수를 했는데, 신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한국에 돌아온 거야. 아이들이 와글와글거리는 장면이었는데 불과 1∼2분짜리 신이었거든. 그 꼼꼼함과 완벽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어.

그 영화를 끝으로 안양촬영소는 계속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수도영화사 사장이었던 홍찬의 손을 떠나 신상옥 감독에게 넘어갔지. 안양촬영소가 부도 처리되기 직전 나는 이미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충무로로 나온 상황이었어. 안양촬영소 기술스탭으로 월급 삼만환을 받으며 호기롭게 시작했던 내 첫 직장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렸지.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을 땐 그렇게 어려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어. 하루종일 충무다방에 죽치고 앉아, 혹시나 아는 감독이 들어올까, 작품을 맡기지 않을까 기다리던 나날이 계속됐고, 신접살림이 꾸며진 집으로 돌아갈 땐 국수 한 다발을 끼고 들어가는 걸 다행으로 여길 정도였지.

해질 무렵의 햇살 한줄기에 매혹되다

사진과 처음 조우한 날을 기억하라고 하면, 첫 촬영 장소가 떠오르는 게 아니라 조그맣고 허름한, 어린 시절의 가게 하나가 떠올라. 보통학교를 다닐 때였어. 주전부리를 사러 가게집엘 갔는데, 해질 무렵이라 가게 안이 어두컴컴했지. 아직 한 가닥 남아 있던 햇살이 판자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데, 그 순간 이상한 광경을 본 거야.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이 거꾸로 된 모습으로 벽에 비치는 거야. ‘이상하다, 아 참 이상하다’ 싶었지. 그 나이에 뭘 알겠어. 그냥 고개만 갸우뚱하고 말았지.

그게 사진의 원리라는 건 알게 된 건 열여덟살 먹고 나서였어. 일제 치하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사진관에 우연히 문하생으로 입문하게 됐지. 어려운 형편에 카메라를 만질 기회조차 없던 나에게 운명적인 기회가 다가온 거지. 3년인가 4년인가 일하는 동안, 웬만한 종류의 카메라는 거뜬히 조작할 수 있는 실력을 쌓게 됐어. 실력을 인정받게 되자 일본으로, 만주로 원정 촬영을 가기도 했어. 바쁜 나날이었지만 돈만 모이면 조그마한 사진관을 차려야겠다는 부푼 꿈이 있던 시절이었어. 그러던 중 징용병으로 발탁이 됐지. 2차대전에 뒤늦게 가담한 소련으로 인해 다급해진 일본이 인정사정 보지 않고 징병을 하기 시작했거든. 불과 몇달에 불과하지만 함경북도 회령의 비행대대로 투입되어 비행기 조립과 정비를 도맡게 됐지. 기계를 만질 수 있게 된 건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됐어. 회령에 머물던 대대가 청진까지 진격했다가 소련군의 기세에 밀려 두만강까지 후퇴, 다시 길주로 빠져서 원산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일정의 한마디로 죽음의 여정이었어. 수용열차에서 사흘, 나흘 굶기는 보통이었고, 대전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주먹밥 한 덩어리를 맛볼 수 있었지.

구술 백영호/ 스틸작가54년간 영화현장 사진에 몸담음<유관순> <생명> <임꺽정> <만다라> <바보사냥> <바보선언> <아다다> 등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작업정리 심지현 [email protected]·사진 정진환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