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온라인 광고업자로 일하는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가 오랜만에 휴갓길에 오른다. 사촌 형제 벤지(키런 컬킨)의 제안으로 성사된 이번 여행에서 두 손자는 최근 돌아가신 할머니의 고향 폴란드를 방문하기로 한다. 사소한 자극에도 과도한 불안을 느끼는 데이비드와 달리, 벤지는 세상의 여유를 다 가진 듯 사회의 도덕률을 넘나드는 악동이다. 바르샤바에 도착한 두 사람은 예약해둔 홀로코스트 투어에 합류해 가이드 제임스(윌 샤프)와 네명의 동행을 만난다. 폴란드, 유대인, 그리고 유대교라는 고유한 키워드로 연결된 이들은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탑, 유대인 공동묘지, 루블린과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 등을 패키지 코스로 둘러본다. 병적인 감정 기복의 소유자 벤지는 투어의 면면을 비난하며 불손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한편, 이를 바라보는 데이비드의 마음에는 가족을 향한 애정과 증오가 뒤엉킨다.
인디영화(<라우더 댄 밤즈> <호신술의 모든 것>)와 블록버스터(<나유 유 씨 미> <배트맨 대 슈퍼맨>) 시리즈를 넘나들며 시네필의 너른 신뢰를 받아온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우디 앨런 영화의 남자주인공으로(<로마 위드 러브> <카페 소사이어티>) 자기 비하적 유대인 캐릭터를 익히 연기해온 그가, 이제 작가주의 감독의 반열에 올라 홀로코스트로부터 3세대 이상 떨어진 유대계 자손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조상이 겪은 참혹함을 뒤로하고 나의 현재적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두고 창작자가 끝없는 내적 토론을 벌인 결과다. 이토록 대담한 감정의 비약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눈빛으로 고통을 품어내는 배우 키런 컬킨이 필요했다. <HBO> 드라마 <석세션>으로 에미상(2023)과 골든글로브(2024)를 거머쥔 컬킨은 차기작 <리얼 페인>에서도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1월5일 열린 2025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쇼팽의 산뜻한 피아노 음악을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는 내내 우울한 언더톤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렇듯 상반된 정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블랙코미디가 <리얼 페인>의 정체성이다.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이라는 세계사적 고통에 견줘보는 개인사적 고통의 정체는, 데이비드의 불안과 강박장애, 그리고 벤지의 자살 생각이다. 데이비드와 같은 장애가 있는 제시 아이젠버그는 이 문제를 대중과 공유하고 자신의 캐릭터에 반영하기도 했다.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느끼면서도 역사적 트라우마와 쉽게 단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실존적 난처함을 반영한 <리얼 페인>은 흥미로운 문제 제기 끝에 최종적인 답변을 내놓기를 유보한다. 90분의 경제적인 러닝타임에서 두 인물의 성격과 갈등을 드러내는 매 에피소드가 반복을 거듭하며 해결 불능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감독이 펼쳐놓은 자전적 토론의 장에 기꺼이 참여할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초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면서 다른 이를 후원하는 사람, <소년이 온다>를 읽고 고통을 느낀 사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에 반대하는 사람일수록 이토록 답이 없고 고통스럽기만 한 질문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close-up
홀로코스트 투어의 정점에는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가 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나치는 이곳에서 8만명 이상을 학살했다. 폴란드영화위원회(Polish Film Institute)와 긴밀하게 협업한 끝에 <리얼 페인>은 마이다네크 수용소 내부를 촬영한 최초의 극영화가 되었다. 지난해 개봉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을 포착했던 태도의 연장에서 아이젠버그의 엄숙한 접근을 바라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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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르완다> 감독 테리 조지, 2004
<리얼 페인>의 투어 그룹에서 흥미로운 서브플롯을 담당하는 엘로지(커트 에지아완)는 르완다 내전의 난민이다. 캐나다로 이주해 유대교로 개종하여 살아가는 그는 감독 친구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탄생한 인물이다. 최악의 제노사이드 사건 중 하나인 르완다 내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호텔 르완다>를 통해 현대의 제노사이드는 유대인 고유의 고통이 아니며 현재진행형 아픔이라는 사실을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