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알레고리를 걷어내고 나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룸 넥스트 도어>는 곧 죽음을 맞이할 육신과 그 죽음 앞에 놓여 있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영화로 보인다. 여기에는 전장을 누비고 사랑을 나누며 펜을 쥐고 글을 쓰던 몸의 확실한 죽음이 있다. 마사(틸다 스윈턴)가 사후 세계의 유령처럼 보이는 순간이 몇초간 있다고 하더라도 <룸 넥스트 도어>에서의 죽음은 관념적 사유를 활보하던 한 존재와 그 세계의 끝이라기보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육신의 종언에 더 가깝게 그려진다.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필름영화에서 디지털영화로 전환되는 한 시절을 소환한다. 기억을 잃은 배우 훌리오(호세 코로나도)와 작품을 완성하는 데 실패한 영화감독 미겔(마놀로 솔로)이 저물어가는 필름영화 시대를 바라보며 이제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려거든 두눈을 감으라 요청한다.
디지털시네마 패키지 이전에 셀룰로이드 필름 릴은 오랜 세월 영화의 몸과도 같이 여겨졌으므로 <룸 넥스트 도어>에서 죽음이 임박한 마사의 육신과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의 필름 릴은 상징적 대칭의 자리에 놓인다. 잃어가는 자리에 놓인 필름-물질과 육신은 서로에게 비유되며 그 반대의 물성을 가진 비물질은 에리세의 영화에 기억으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는 디지털 시대로 대비된다. 이들 사이에 공통된 상실은 단 하나, 필름-물질의 죽음과 육신의 죽음이다. 영화 생태계 안에서 마치 다른 종(種)인 양 마주칠 기회가 없던 두 스페인 출신 영화감독은 영화가 더이상 필름으로 촬영되지 않는 지금 영화는 몸을 잃었다고 여기는 데에서만큼은 생각을 나란히한다. <룸 넥스트 도어>와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필름 시대를 살아온 영화감독이 잃어버린 영화의 육신, 셀룰로이드 필름을 향해 여전히 느끼는 처연한 환상통으로 이들은 사라진 신체의 환부를 오래도록 어루만진다.
<룸 넥스트 도어>, 육신의 죽음은 완전한 끝이 아니다
에리세에 앞서 알모도바르는 <브로큰 임브레이스>로 필름영화 시대에 쓰라린 안녕을 고했다. 전직 영화감독 마테오는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는다. 필름 릴로 영화를 제작하던 20세기 말까지 마테오의 두눈은 무사했지만 디지털영화 제작으로 이행하는 시기에 그는 맹인으로 그려진다. 영화를 만드는 이에게 ‘볼 수 없다’는 신체 불능은 절망적이다. 필름 시대에 마침표를 찍는 결정적 사건은 마테오의 35mm 필름영화에 출연했던 연인 레나의 죽음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마테오의 안폐와 레나의 죽음으로 필름영화를 다시 불러올 수 없는 과거에 안장한다.
<룸 넥스트 도어>에서 마사의 몸은 알모도바르의 전작에서 경유한 영화의 알레고리가 모두 사라지고 존엄사와 끈끈히 얽힌 담론적 장소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오랜만에 해후한 옛 동료 잉그리드에게 끝없이 과거를 말하기 시작할 때 마사를 영화와 같이 ‘발화하는 몸’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틸다 스윈턴은 어머니 마사와 딸 미셸까지 1인2역을 맡았다. 영화의 근간은 사진 이미지이며 사진 이미지는 근원적으로 복제를 기반으로 한다. 예상하지 못한 역할을 유명 배우에게 줄 때 흔히 하는 눈속임 분장이나 CG의 손을 빌리지 않은 채로 미셸이 마사의 복제된 이미지처럼 등장할 때 서로 닮은 마사와 미셸을 연기하는 틸다 스윈턴은 무표정으로 사라진 아우라마저 표현하려는듯 보인다. 마사의 죽음 이후 등장한 미셸로 인해 마사는 육신의 죽음이라는 서사에서 물질 시대에 속한 영화의 죽음으로 성큼 다가선다.
<룸 넥스트 도어>의 도시와 숲에 눈이 내리면 영화 <죽은 사람들>의 대사가 되풀이된다. 최초는 도시에 내리는 분홍색 눈송이를 바라보는 마사에 의해, 다음은 마사와 잉그리드가 함께 보는 존 휴스턴의 영화 <죽은 사람들>에 의해, 마지막은 마사의 죽음 이후 잉그리드에 의해서다. 원안의 영화를 제외하면 이들 마사와 잉그리드는 자기만의 언어를 사용한다. 마사를 곧 영화라고 할 때 그는 복제되고 재생산될 수 있는 텍스트로서의 영화다. 발화에 귀 기울여 호응하는 잉그리드의 역할은 수용적 관객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죽음을 향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마사의 죽음을 자기만의 텍스트로 재해석한다. 이때 잉그리드는 청자의 자리에서 물러나 무한한 의미를 지닌 텍스트를 무한하게 다시 쓸 책임이 있는 관객- 동료 작가이자 비평가- 으로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육신의 죽음은 완전한 끝이 아니다. 펜을 쥐고 종이 위에 육필을 남긴 마사가 물질 시대의 작가라면 잉그리드는 키보드로 디지털 활자를 이어가는 비물질 시대의 작가다. 마사의 사후, 물질 시대의 종언은 잉그리드와 미셸에 의해 애도될 것이며 그의 삶은 다시 쓰일 것을 기약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기억된다면 죽은 것이 아니다
뒤늦은 도착처럼 보이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앞선 에리세의 전작 <햇빛 속의 모과나무>에는 화폭 위에 모과나무를 그대로 옮겨 그리려는 화가 안토니오 로페스가 등장한다. 그는 잎사귀 하나와 과실의 무게를 그림에 담고자 하지만 나무는 점점 시들어간다. 에리세는 이미 시간 앞에 속절없이 늙어 부패할 물질이 처한 운명을 관찰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그가 영화사에서 이미 사장된 것이나 다름없는 필름-물질을 기억이 소실된 배우와 평행선 위에 두고 필름영화 시대의 죽음을 바라본 일은 이상하지 않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는 필름-물질의 죽음만이 남고 훌리오의 기억이라는 비물질은 휘발된다. 스러져가는 필름의 생명력은 기억을 소실한 채로 훌리오의 육신에 봉인되어 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필름영화가 훌리오의 몸에 각인한 소리 감각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의 마지막은 화면 가득한 훌리오의 두눈을 감는 모습이지만 암전 후에도 상영관에서 잔잔하게 들려오던 필름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훌리오에게 익숙한 그리움을 환기시킬지도 모른다. 끝까지 영사되어 소임을 다한 필름 릴이 스프로킷에서 빠져나온 후에도 미처 회전을 멈추지 않고 돌아가며 필름 끝머리가 팔락인다. 이제 필름영화 상영은 종료되었다. 필름-물질의 죽음은 아직 선언되지 않았다.
<사물의 소멸>은 오가와 요코의 소설 <은밀한 결정>으로 서두를 연다. 이 소설 속 섬에서는 사물이 소멸하고 나면 사물에 대한 관념도 깨끗이 지워진다. 그렇게 섬의 주민들은 소멸한 사물이 있었다는 것을 잊는다. 급기야 신체 일부가 소멸해도 사람들은 그 신체 부위가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고 그것이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 마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살아남은 미셸과 잉그리드의 몫이듯 물질 시대를 대변하는 필름영화 시대에의 망각을 향한 비애는 오직 그 시대를 기억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사라진 것을 기억하는 이를 제외하곤 아무도 상실을 슬퍼하지 않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사라진 필름영화 시대를 회고하지만 완전한 죽음의 선언이라 여길 수 없는 이유는 영화에서나 현실에서 필름영화 시대는 아직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마침내 필름 릴이 사라지고,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던 세대가 사라지고, 필름영화를 목격한 세대가 사라져 더는 누구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바로 필름-물질의 죽음이 집행된 때일 것이다. 정녕 그때가 온다면 필름-물질의 소멸이 마지막인지도 모른 채 그것이 비극인지조차도 끝내 알 수 없어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