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여성의 몸짓이 있다. 간소한 가구가 놓인 가정의 실내 공간 안에 있다. 꼼짝없이 피사체를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 앞에 있다. 지속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진 플랑세캉스 안에 있다. 부엌 가스 조리대 앞에 서 있던 여인은 복도로 나가서 한 남성에게 문을 열어준다. 복도 끝의 방 안으로 사라졌던 여성은 남성과 함께 방문을 열고 나와 우리가 보고 있는 시각적 장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남성이 떠나고 난 후 여성은 다시 부엌, 방, 욕실 등 가정의 평범한 공간 속에서 일상적인 동작을 이어간다. 가스 조리대 앞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서서 불을 조절하고, 두손으로 방의 창문을 열고, 초록색 벽 앞의 흰색 욕조에 쭈그리고 앉아 몸을 씻는다. 몸을 다 씻고 나서는 부지런한 손동작으로 욕조를 닦는다. 식탁보를 깔고, 그릇을 놓고, 감자를 깎고, 고기를 저민다. 3시간10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우리는 거의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 일하는’ 여성, 주부, 어머니를 본다. 여인의 몸짓, 이 일상의 몸짓은 마치 정신과 신체의 에너지를 소진하려는 듯이 계속된다.
이 영화는 25살의 신예감독 샹탈 아케르만과 촬영감독 바베트 망골트가 프랑수아 트뤼포, 알랭 레네와 같은 누벨바그 감독의 영화 속에서 극적이고 신비한 신체를 현시했던 델핀 세리그를 기용해 만든 영화 <잔느 딜망>(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 1975)이다. 이 영화는 영국영화연구소(BFI)와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2023년 영화 전문가 의견을 취합하여 선정한 100편의 클래식영화 중 가장 중요한 영화로 뽑혔다. 뉴욕 구조주의적 실험영화의 영향을 드러내는 미니멀하고 모던한 형식, 외화면을 빼어나게 활용하는 프레임, 플랑세캉스로 드러나는 영화적 시간의 경험, 페미니즘적 관점, 미술관 설치 작업과의 관계 등 <잔느 딜망>을 통해 다룰 수 있는 영화적 주제 또는 영화 너머의 주제는 무수히 많다. 델핀 세리그의 몸짓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잔느 딜망>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잔느 딜망>뿐 아니라 “반향을 조직하고 정확한 리듬을 발견하려고”(클레르 아테르통) 했던 아케르만의 영화 전체를 몸짓의 영화로 다루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케르만은 이미 첫 단편 <나의 도시를 날려버려>에서 슬랩스틱 코미디언의 신체로 연기했다. 부엌 바닥에 세제를 풀었다가 이를 다시 닦아내는 주인공의 동작은 청소의 동작이기보다 무용함과 무의미를 예시하는 신체적 분탕질에 가깝다. 첫 장편영화 <나, 너, 그, 그녀>(Je, Tu, Il, Elle)에서도 카메라는 격렬함과 나른함 사이를 오가는 몸을 담았었다. 아케르만의 영화에서 격렬함과 나른함은 신체를 통해 동등하게 교환된다. 그런가 하면 소비주의의 무대인 쇼핑 아케이드를 배경으로 의도적으로 키치한 형식으로 구현한 뮤지컬영화 <80년대 갤러리>에서도 몸짓의 실험은 계속된 바 있다. 그러므로 연재의 지난 글(<씨네21> 1485호,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영화를 춤과 움직임, 정지, 몸짓에 관심을 공유하는 예술로 조망할 때 아케르만의 영화는 그 탁월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잔느 딜망>과 감독 아케르만이 제작 지원금 신청을 위해 적어낸 <잔느 딜망>의 시나리오는 사뭇 다르다. 아케르만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중년 여성과 매춘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이 이야기에 원래 <잔느 딜망>이라는 제목 대신 <그녀는 미국으로 항해한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에 더해 애초의 시나리오에는 노동자, 무정부주의자 등 이웃, 이혼, 레즈비언 경험에 관한 여러 개의 에피소드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애초 시나리오에 존재하던 이웃과 여타 에피소드는 최종 완성본에서 모두 사라진다. 대신 앞에 언급한 몸짓, 시간을 조직하는 몸짓, 공간을 배치하는 몸짓, 자동화된 몸짓이 남는다. 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말하는 몸, 영화적 구조가 만드는 몸짓이 아니라 구조를 만드는 몸짓이 남는다.
<잔느 딜망> 속 몸짓은 같은 감독이 연출한 뮤지컬 <80년대 갤러리> 속 몸짓과 정반대의 몸짓이다. <80년대 갤러리>에서 춤은 자유의 표현이자 감정의 발산이었던 반면 <잔느 딜망>에서 신체의 몸짓은 우선 “규칙성의 안무”(X. 바에트)에 가까워 보인다. 잔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규칙에 따라 일상의 몸짓을 반복한다. 영화는 잔느의 몸짓을 정제된 프레임에 담는다. 더 정확히, 아니 다르게 말하자면 <잔느 딜망>은 시공간의 프레임 안에 몸짓을 담은 영화가 아니라, 몸짓을 통해 시공간의 프레임을 만드는 영화다. 욕조를 닦고, 감자를 준비하는 몸짓에 따라 시간의 지속과 간격, 공간의 압축과 팽창이 만들어진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던 일상의 폭발을 만들어내는 것도 바로 “고장에 선행하는 규칙성의 안무”(X. 바에트)다. 일상의 몸짓과 안무를 연결하는 포스트 모던 댄스의 문법을 통해 <잔느 딜망>, <잠>(앤디 워홀, 1964), <핸드 캐칭 리드>(리처드 세라, 1968) 등의 영화 속 몸짓을 분석한 글에서 X. 바에트는 <잔느 딜망>의 촬영을 담당했던 바베트 망골트가 현대무용과 맺고 있었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다. 예컨대 망골트는 다수 현대무용가의 사진을 촬영해온 사진작가였을 뿐 아니라 <잔느 딜망> 제작보다 2년 앞서 현대무용가 루신다 차일즈의 작품을 출발점으로 삼은 동명의 영화 <칼리코 밍글링>을 연출한 실험영화 감독이기도 했다. <칼리코 밍글링>에서 두 계열 교차편집, 정면 숏, 하이 앵글 숏 등은 안무의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도구였다. 망골트는 <잔느 딜망>에서도 정면성과 측면성을 강조하는 촬영을 통해 델핀 세리그의 안무된 규칙성의 몸짓을 강조한다.
아케르만의 삶과 작업의 내밀한 동반자 중 한 사람이었던 첼리스트 소니아 위더 애서튼은 아케르만의 글쓰기와 신체리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아침나절 글을 쓰고 있는 샹탈의 손, 박자를 맞추는 손, 심지어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사람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리게 하면서 샹탈 주위를 맴도는 손의 레이스를 본다. 늘 거의 구두점이 없는 샹탈의 글,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지기를 그치지 않는 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던 것처럼, 시작도 끝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글의 리듬이 여기, 바로 이 동작에서 태어난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영화는 매일의 몸, 동작, 소리, 침묵을 춤으로 바꿀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예술이다. 아케르만의 영화는 사람과 사물이 말없이 말하고, 도약 없이 도약하는 것을 허용한다. <저 아래>(2006)에서 창문에 매달린 베네치아 블라인드는 아케르만의 목소리를 배음 삼아 흔들린다. 춤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