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경매시장에 다녀왔다. 소들이 사고 팔리는 곳이다. 다들 소 경매시장이라고 하면 금방 떠오르는 풍경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텔레비전에서 종종 봤던 풍경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수많은 소들이 통로쪽으로 엉덩이를 향한 채 일렬로 쭉 묶여 있고,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소들의 몸을 구석구석 살핀다. 그리고 경매가 끝나면 소들은 새로운 주인과 함께 트럭에 실려 떠난다.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데 조금 난감했다. 밀폐된 공간에 수만 마리의 닭들이 사는 양계장이나 돼지들이 맞으며 끌려가는 도살장 앞에서 느꼈던 충격을 바로 받지는 않아서였다. 상대적으로 낫다는 착각이 들어서일까. 많은 인파가 내 시선을 흩트리기도 했다. 소에게만 집중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찍으러 다녔다. 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담고 있는데 몇몇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뭘 찍고 있냐, 유튜브 하는 거냐, 여기에 뭐 찍을 게 있냐. 그러다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이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촬영하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그중 한명이 물었다. “이거 왜 찍어요?” 나는 카메라 화면에 여전히 반쯤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동물들 찍으러 다니고 있다고. 소, 돼지, 닭 등의 삶을 찍는다고. 아차, 동물의 ‘삶’이라니. 적당히 둘러대도 되는데 너무 진지하게 답을 해버렸다. 그냥 흘려들을 법도 한데 그가 되물었다. “얘네들한테 삶이 있어요? 죽는 게 삶 아니에요?” 잠시 정적….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별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계속 이어가자니 초면에 깊은 대화가 될 것이므로. 여기서 내 진심을 드러낼 필요도 없다.
“얘네들한테 삶이 있어요? 죽는 게 삶 아니에요?” 이상하게 그 말이 자꾸 맴돌았다. 그러게. 죽기 위해 태어난 동물들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죽임당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20대 초반 정도 됐을까. 소를 팔러 왔다고 했다. 아마 아침부터 농장에서 트럭에 타지 않으려는 소들을 힘들게 실어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연배가 있는 축산업 관계자들과 대화할 때면 소는 가축이고 이용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너무 견고하게 느껴져서 개인의 깊은 생각이 궁금해지진 않았다. 그저 경매시장에 관한 정보를 얻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젊은 사람의 말은 뭐랄까, 여운이 남아 자꾸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소에게 삶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그런데 삶이란 뭘까. 삶이란 어떠해야 하나. 그럼 나는 소의 삶이 있다고 해야 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 소가 겪는 일들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소에게는 삶이 없다고, 그에게 삶을 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소에게 삶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지금 현재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그러니까 이런 삶은 의미 없다고 말하는 건 무례하고, 이것도 삶이라는 말이 현실을 합리화하는 데 쓰이지는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묻지는 못했지만 말을 건 그에게도 묻고 싶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소를 돌보았을 그에게. 소가 저렇게 사는 걸 정말 당연하게 여겨서 던진 말인지, 당연하지 않은데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건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삶’이라는 이 흔한 단어를 축산동물에 갖다 붙이니 ‘소의 삶’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동물의 복지를 개선해야 한다거나 인도적인 도축이 필요하다는 식의, 결국은 축산업을 견고하게 하는 언어가 아닌 돼지의 삶, 닭의 죽음과 같이 동물의 편에 있는 언어를 적극적으로 쓰고 싶다. 발화하다 보면, 우리가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폭력이 서서히 보일지도 모르겠다.
경매시장에 있은 지 몇 시간이 흘렀을까. 카메라 프레임 한가운데에 소들을 담으며 인간들이 ‘아무렇지 않다’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 역시 처음 경매시장에 들어섰을 때 애써 노력해야만 겨우 소의 표정이 보이고 그의 감정을 느낄 만한 상태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까. 다시 카메라를 들고 소에게 다가간다. 눈에 익숙할 뿐, 사실 너무 이상하고 어지러운 풍경이다. 다리에 힘이 없는지 한 소가 주저앉았는데 머리에 끈이 매여 있어서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있다. 얼마나 불편할까.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한 소는 다른 소들보다 덩치가 작고 얼굴과 몸 곳곳에 버짐이 심하게 퍼져 있다. 얼굴의 끈이 닿는 부분에서 피와 진물이 흐르고 있다. 엄마 소와 같이 온 아기 소도 있다. 다리를 접고 앉은 아기 소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섰다가, 혼자가 되면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한다. 칸막이 옆의 엄마 소는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입에 거품을 잔뜩 물고 있다. 바닥에 침이 뚝뚝 떨어질 정도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통로쪽으로 엉덩이를 향한 소들이 늘어선 모습은 모욕적이다. 친구는 이를 두고 “대신 수치심을 느낀다”고 표현했다. 문득, 과거의 노예시장도 이렇지 않았을까.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풍경이 지금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동물의 경매시장은?
잊히지 않는 소가 있다. 경매시장의 한쪽에서 수의사들이 소들에게 접종을 하고 있었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소들이 크게 울었다. 그중 한 소에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칸막이 옆의 소가 주사를 맞으며 소리를 지르자 이 소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알아채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표정에 서린 공포, 두려움을. 소는 벗어나려고 버둥거리지만 줄로 묶여 있어서 도망칠 수 없다. 이제 자신이 주사를 맞을 차례가 되자 소는 수의사가 몸에 손을 대기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펄쩍펄쩍 뛴다. 주삿바늘이 몸에 들어가자 마구 소리를 지른다. 이제 수의사는 접종 완료의 표시로 파란 래커를 소의 이마에 뿌린다. 소는 또 깜짝 놀란다. 살아 있다. 살아서 느끼고 있다. 이마에는 대충 그어진 파란 줄이 남았다. 래커 칠은 직전에 본 인간의 어떤 행위보다 소를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눈으로, 또 카메라로 소를 가까이서 보고 그의 표정을 보며 감정을 알아채는 건 사실 힘들다. 마음이 힘들다. 그렇다고 동물에게 신경 쓰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