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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시저를 위하여!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앤디 서키스의 연기는 오롯이 디지털 캐릭터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반지의 제왕> 삼부작(2001~2003)의 골룸, <킹콩>(2005)의 킹콩, <혹성탈출> 리부트 시리즈(2014~17)의 시저를 연기한 배우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도전한 모션 캡처 연기는 기존의 영화 연기와 현격히 다르다. 모션 캡처는 배우의 움직임과 연기를 포착하고, 전송하고, 전환하여 최종적으로 다른 신체에 코드화하는 것을 뜻한다. 배우는 특수 제작된 슈트를 입고 신체 곳곳에 마커를 부착한 상태로 연기를 해야 하기에 사실상 그 과정은 기계장치를 활용해 선보이는 일종의 묘기에 가깝다. 서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생성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가 화면 바깥으로 사라지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여 하나의 범례를 남겼다는 이유로 그를 ‘모션 캡처 연기의 왕’이라고 부른다.

서키스는 한 인터뷰에서 모션 캡처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것은 배우의 퍼포먼스를 다르게 기록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모션 캡처 연기가 전통적인 연기와 마찬가지로 캐릭터의 몸과 마음 모두를 표현할 수 있다고, 즉 대상의 리얼리티를 총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런데 모션 캡처의 기계적 자동성이 물질적인 수준에서 대상의 형태와 움직임을 정밀하게 포착하는 것을 넘어 정신적인 차원에서 디지털 캐릭터의 감정과 욕망을 표현한다는 것이 정녕 가능하다는 말인가? 흥미로운 것은 이 분야의 다른 개척자들 또한 모션 캡처가 어떤 대상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모두 포착할 수 있기를 바랐다는 점이다.

<아바타>

관련해서 <아바타>(2009)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모션 캡처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배우의 움직임보다는 배우의 연기 그 자체에 초점을 두었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모션 캡처라는 단어를 대신하여 퍼포먼스 캡처라는 단어가 쓰이기도 한다. 이 작품이 모션 캡처와 관련해서 새롭게 시도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배우의 얼굴 근육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페이셜 퍼포먼스 캡처를 시도한 것이다. 이는 배우의 연기를 디지털 캐릭터에 충실하게 옮기는 것을 지향한다. 다른 하나는 모션 캡처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가상의 이미지로 전환해서 보여주는 시뮬캠이라는 모니터를 제작 과정에서 활용한 것으로, 이는 배우와 디지털 캐릭터 사이의 물질적 및 심리적 거리를 최소화하는 것을 추구한다. <아바타>의 제작 과정에 모션 캡처와 관련된 이러한 두 가지 새로운 시도가 있었음을 고려해본다면 이 작품은 관객이 디지털 캐릭터를 외형적으로 그럴듯하게 인식하면서 그와 동시에 디지털 캐릭터의 감정적 상태에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 앙드레 바쟁이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적 본성을 이야기하면서 말한 “마음을 설레게 하는 현존”, 즉 바라보는 자에게 감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설렘을 주는 어떤 대상의 현존을 모션 캡처로 획득하려고 한 것이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

<혹성탈출> 리부트 시리즈의 출발과 끝에는 디지털 캐릭터의 ‘몸-만들기 프로젝트’(body-building project)가 있다. 디지털 시각효과 연구자 크리스틴 휘셀은 인간의 퍼포먼스와 디지털애니메이션을 결합하여 디지털 생명체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몸-만들기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캐릭터는 영혼 없는 신체, 그렇다고 신체 없는 영혼도 아닌 감정, 욕망, 갈망을 체화한 존재이다. <혹성탈출> 리부트 시리즈는 모션 캡처의 제작 공정을 크게 다음과 같이 개선하여 디지털 캐릭터의 물질적 리얼리티와 심리적 리얼리티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 시리즈는 모션 캡처 전문 스튜디오에서 배우의 움직임을 포착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야외 촬영지에서 실사 촬영과 모션 캡처를 동시에 진행해서 만들어졌다. 시저 역을 맡은 서키스의 주요 연기는 모션 캡처 전문 스튜디오에서 허공을 바라보거나 테니스공을 바라보면서 이루어지는 대신 탁 트인 야외촬영장에서 실사 배우인 제임스 프랭코, 제이슨 클라크, 우디 해럴슨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모션 캡처가 야외 촬영지에서 실사 촬영과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점은 모션 캡처 배우가 디지털 캐릭터가 처해 있는 상황과 맥락을 몸소 체험하면서 연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달라진 제작 여건이 있었기에 서키스는 자신이 연기하는 시저의 실존적 고민을 체화된 형태로 표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이 시리즈는 유인원의 머리카락, 솜털, 모공, 주름, 눈동자 외에도 빛, 그림자, 바람 등 자연적 요소의 정밀한 재현에 도전한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이 시리즈의 3편에 해당하는 <혹성탈출: 종의 전쟁>(2017)은 설원과 같은 자연적 공간을 극한의 배경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축축하게 젖은 털과 수축한 근육을 세부적으로 묘사한다. 설원의 추위와 같은 주변 환경에 반응하면서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극 중 유인원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시선이나 서로를 쓰다듬는 행동에 서사적 개연성과 함께 감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이 시리즈는 모션 캡처 배우의 자유로운 연기를 보장하고 디지털 캐릭터의 물질적 리얼리티를 확보함으로써 관객이 작품 속 인물, 사건, 환경 등에 정서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시저라는 디지털 캐릭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저는 모션 캡처가 낳은 자식과 같지만, 그런 이유로 시저를 기술에 속박된 존재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시저는 기술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바라보는 이미지와 관객이 상상하는 이야기 속에서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시저를 위하는 길은 시저를 낳은 기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모션 캡처의 기술적 고도화는 대상에 대한 강박적 묘사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혹성탈출> 리부트 시리즈는 디지털 캐릭터의 묘사에 집착하면서도 그것의 과잉을 제어하기 위한 하나의 효과적 수단으로 서사를 중요하게 활용한다. 관객이 시저의 표면을 바라보면서 가질 수 있는 기괴함, 낯섦, 두려움 등은 시저의 갈등과 고뇌에 따른 그의 심리적 상태의 변화, 즉 그의 영혼의 오디세이를 통해 사그라들 수 있다. 시저의 몸과 눈은 인간과의 대립 속에서 도덕적 갈등과 윤리적 고뇌가 불거지는 주요 서사적 국면 속에서 잔잔하게 흔들리거나 격렬하게 요동친다. 그런 이유로 시저의 신체적 떨림을 지독히도 꾸준히 묘사하는 이 영화의 기술적 성취는 시저의 영혼을 다스리기 위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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