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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휘갈겨 쓴 작가 노트, 이병현 평론가의 <잇츠 낫 미>
이병현 2025-01-08

황제가 물었다.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요?”

달마 대사가 답했다. “알지 못합니다(不識).”(<벽암록> 제1칙)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14:9)

<알레고리>가 레오스 카락스를 ‘동굴의 비유’ 속 철인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내세워 짐짓 멋들어지게 예술가의 존재론을 설파하는 것과 달리 <잇츠 낫 미>는 상당히 정의 내리기 힘든 사적인 작품이다. 일단 이 영화의 제목부터가 엉뚱하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잇츠 낫 미>는 파리 퐁피두센터 요청에 따라 제작된 현대 미술작품으로, 본래 퐁피두센터가 ‘자화상’을 주제로 작품을 의뢰하며 던진 질문은 영화 초반에 나오다시피 “레오스 카락스, 어디 계신가요?”였다고 한다. 레오스 카락스는 이에 대해 “그건 내가 아니다”(It’s not me)라고 답하고 있는데, 보통 어디 있냐고 물으면 ‘여기 있다’고 답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어디 있냐고 외치며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사람 뒤에 다가가 어깨를 툭툭 치고는 나는 네가 찾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답하는 건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짓궂은 농담 같은 행위다.

이런 농담은 낯설지 않다. 본래 예술가들이란 스스로 정의 내리는 행위를 싫어하기 마련이다. 언젠가 랭보는 “나란 타자이다”(Je est un autre)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랭보는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면서 “‘내가 생각된다’(사람들이 나를 생각한다)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나를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만큼이나 예술가를 잘 정의하는 말이 있을까?

이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술가란 항상 그의 작품으로 정의된다. 감독의 사생활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카락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말은 선글라스, 담배, 해운대 해변에서의 낮잠 따위가 아니라 작품마다 나오는 트래킹숏과 데자뷔 같은 반복 장면 등이(어야 한)다. 적어도 카락스 본인은 그렇게 믿는 듯하다. <잇츠 낫 미>는 자화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휘갈겨 쓴 작가 노트다.

이를테면 마이브리지가 찍은 달리는 말 사진과 드니 라방의 달리기가 음조 몽타주로 연결되는 대목에서 카락스는 자기가 찍은 이전 영화의 몇몇 장면과 초기 사진을 뒤섞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필모그래피가 명확하게 영화사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자의식을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카락스는 이어지는 장면에서 F. W. 무르나우와 앨프리드 히치콕을 직접 인용하며 관객이 카락스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떠올리는 두 가지 작가적 인장에 대한 해설을 시도한다.

카락스는 먼저 무르나우의 <선라이즈> 속 트래킹숏을 인용하며 ‘마치 신이 뒤에서 근엄한 눈빛으로 따라가는 느낌’의 트래킹숏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신의 눈빛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라고 되묻는다. 또 히치콕의 <현기증> 속 시점숏을 인용하면서는 자신이 지금까지 “시점 방식(등장인물의 시점숏)으로는 찍어본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데자뷔 장면을 찍고 싶다”고 말한다.

<현기증>은 말할 것도 없이 데자뷔 효과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히치콕의 작품이 으레 그렇듯이 시점숏 없이는 거의 기능하지 않는 영화다. <선라이즈>의 트래킹숏 역시 카락스가 이미 말했듯 무르나우 시대의 무거운 중력이 사라진 현대에는 재현할 수 없는 숏이다. 카락스는 필요조건 없이 명제를 참으로 만들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레오스 카락스의 트래킹

실제로 카락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모티브 중 하나인 트래킹숏은 주로 드니 라방의 곡예적 움직임과 음악을 결합해 화면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이것은 무르나우 영화의 트래킹숏처럼 근엄한 신의 눈빛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잇츠 낫 미>에서 중력의 대치어로 제시한 ‘가벼움’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런즉 카락스의 트래킹숏을 굳이 ‘신의 시선’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그것은 근엄한 눈빛보다는 가벼운 활력이 넘치는 눈빛을 지닌 신,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에 가까운 자가 보내는 시선이라고 봐야 한다.

데자뷔 장면은 어떨까? 이번 영화에 짤막하게 인용된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결말에서 가위 든 인물이 피 흘리는 장면을 두 가지 버전으로 반복한다. 두 장면에는 시점숏이라고 할 만한 숏이 나오지 않는데, 한 가지 사건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데자뷔 효과가 발생하고는 있지만 <현기증>과는 분명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잇츠 낫 미>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에 따라 카락스가 꾼 꿈의 성공 여부에 관해서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네트 인형을 활용해 <나쁜 피>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이 트래킹숏은 실은 트래킹 없는 트래킹숏이다.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드러난 검은 옷 입은 줄인형 예술가가 트레드밀 위에서 아네트 인형을 달리게 만든다. 카메라는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서 아네트가 보위의 ‘현대적 사랑’에 맞춰 알렉스처럼 달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 마지막 장면은 모든 게 가짜다. 모든 게 가짜라는 걸 숨기지도 않는다. 아네트는 사람이 아니고, 카메라는 움직이는 대신 고정돼 있으며, 애초에 다른 영화에 나온 장면을 그대로 따라서 만들었을 뿐이다. 오직 다른 것은 노래가 끊기는 순간 미끄러지듯 멈춘 후 뒤돌아 달렸던 알렉스와 달리 마지막 순간 아네트가 중력을 무시하고 하늘을 날아오른다는 점뿐이다. 무르나우의 트래킹숏이 중력의 트래킹이라면, 아네트의 질주는 무중력의 트래킹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분명 <선라이즈>나 <나쁜 피>의 트래킹숏과는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감흥이 배어나오고 있다. 이것은 분명 중력이 사라진 시대에도 인상적인 트래킹숏을 찍을 수 있음을, 즉 무르나우를 재현하기보다는 쇄신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배치된 데자뷔 같은 장면이다.

불가능한 도전에 성공했다는 카락스의 말을 믿어야 할까? 당신이 어떻게 판단하든 당신은 이미 카락스를 생각하고 있다. 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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