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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열의 촬영 미학: 물질로 영화 읽기] 카메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민중을 맞이하다, 왕빙의 <청춘> 연작
박홍열(촬영감독) 2025-01-01

탄핵 집회에서 만난 청춘은 한국 사회가 규정해놓은 청춘들이 아니었다. 기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불안한 사회를 청춘들은 그들만의 에너지로 전복시키고 세대를 아우르며 저항의 힘을 만들어냈다. 윤석열의 내란 행위에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는 청춘들을 보며 왕빙의 최근작 <청춘> 연작이 떠올랐다. 왕빙의 <청춘>은 고정된 의미의 ‘청춘’이 아니다. 기존의 청춘과 다른, 규정할 수 없는 청춘을 다른 방식으로 담고 있다. 카메라와 카메라 안에 담긴 물질들로 <청춘> 연작 안의 청춘을 읽어보려 한다.

<청춘>은 중국 즈리진의 최대 아동복 봉제 공장 단지에서 일하는 청소년과 청년 노동자들의 삶을 2014년부터 2019년까지 기록한 영화다. 왕빙의 전작 <비터머니>와 이어지며 <청춘(봄)>, <청춘(하드 타임즈)>, <청춘(홈커밍)> 3편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즈리진은 상하이 서남쪽 도시로 1만8천곳의 봉제 공장이 있고, 여기서 생산되는 아동복은 연간 15억개 세트, 12조원 매출로 중국 아동복 시장의 2/3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시골 출신의 30만 이주노동 청춘들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닭장 같은 낡은 아파트형 공장 안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진실은 카메라의 위치에

<청춘(봄)>

카메라의 위치를 보면, 영화가 해야 할 일을 무엇으로 설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의미 전달이 목적인지,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지에 따라 카메라의 높이가 달라진다. 왕빙의 카메라는 인물들보다 낮다. 인물들이 낮게 앉아 있을 때는 카메라를 더 낮게 낮춘다. 카메라 높이가 대상보다 낮아진다는 것은 찍는 사람이 몸을 더 낮게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한 인물을 길게 팔로잉하거나 롱테이크로 촬영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쉽지 않다. <청춘>의 대개의 장면은 낮은 자세로 카메라를 든 채 핸드헬드로 촬영했다. 다큐멘터리 현장은 우연의 연속이기 때문에 숙련된 창작자들은 오히려 매 순간 다음을 예측하고 카메라를 그 예측 위에 놓는다. 하지만 왕빙은 어떤 예측도 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찍고 있는 인물을 앞서거나 그의 이동경로를 예상하고 앞서가서 촬영하지 않는다. 초점심도가 얕은 망원렌즈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에서 망원렌즈로 촬영되는 장면들은 창작가가 예상한 경로에 놓인 이미지들인 경우가 많다. 망원렌즈는 화각이 좁고 대체로 심도가 얕기에 우연을 배제하고 고정된 의미의 이미지들을 카메라 앞으로 강제로 가져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왕빙의 렌즈는 카메라를 고정시키지 않는다. 카메라렌즈로 찍고 있는 대상을 카메라 앞으로 당겨오지도 않는다. 대상을 가까이서 보고 싶을 때는 카메라가 대상에게 다가선다. 촬영에서 롱테이크로 길게 보여주는 행위도 이런 태도와 맞물려 있다. 와이드렌즈로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 깊은 심도로 공간과 함께 대상을 보여준다. 인물 너머 보이는 작은 존재들도 살아 있도록 그곳, 그 순간 벌어진 일들을 올곧이 담으려 한다. 왕빙의 카메라가 DSLR로 바뀌고 촬영하는 사람들도 여러 명이 되면서 그의 영화 안에 가끔 이질적인 컷이 들어올 때가 있다. <청춘(하드 타임즈)>에서는 여성 공장 노동자의 정면 바스트숏이 들어올 때, <청춘(홈커밍)>에서는 귀향한 청년 노동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을 때 카메라가 달라진다. 다른 촬영자가 촬영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이다. 찍고 있는 인물들을 카메라 자신의 위치에서 망원렌즈로 당겨 얕은 심도로 보여준다. 주어진 조명 환경과 공간 안에서 촬영자가 취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왕빙은 카메라 들기가 어려운 공간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카메라 뒤에서 불편한 자세로, 깊은 심도의 넓은 화각으로 대상에게 다가가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청춘들을 자신의 기준으로 먼저 규정하지 않고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 눈높이에 맞춰 보고 듣고 마주하려는 태도다.

솟아나는 시간

<청춘(하드 타임즈)>

왕빙의 작품은 대부분 러닝타임이 길다. <청춘> 시리즈도 예외는 아니다. 3편의 연작을 합치면 10시간 가까이 된다. <비터머니>까지 4편을 연결한다면 13시간이 넘는다. 왕빙이 <비터머니>에서 만난 청춘은 나이를 속이고 비터머니(쓴맛의 돈)를 벌기 위해 청춘의 시간을 바치는 청춘들이다. 왕빙은 중국 사회의 청년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바라보고 카메라를 들었을 것이다. <청춘>에서의 카메라는 다르다. 왕빙은 청춘들의 장시간 동일 노동 안에서 비집고 올라오는 균열들을 포착한다. 청년들의 노동 안에서 노동 외 일상을 보여준다. 5년이란 긴 시간을 촬영하면서 왕빙이 만난 것은 본인이 처음 예상한 청춘이 아니다. 즈리진 봉제 공장의 풍경 속에서 다른 청춘을 발견하고 그대로 담아낸다. 그들은 시끄러운 재봉틀 소음 사이에서 음악을 듣고 따라 부른다. 분주히 일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애정 행각을 벌이고 다투기도 한다. 일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서로 경쟁도 한다. 수동적으로 일만 하던 청춘들이 임금 협상을 할 때는 함께 뭉쳐 사장과 단판을 벌인다. 다큐 속 청춘은 노동자이면서 청소년이고, 누군가의 자식이면서 아빠이기도 하고, 한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이기도 하다. 놀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청춘’이다. 매번 달라지고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청춘들이다. 즈리진 공장에서 일하는 청춘을 담아내려면 그들의 일상을 재단하지 않은 시간으로 보여줘야 한다. 물리적으로 긴 러닝타임이 필요하다. 다큐 안에서 러닝타임이 짧으면, 그 시간 안에서는 규정하고 규정된 의미만을 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청춘>의 러닝타임 10시간 안에 담긴 5년의 기간은 순차적이지 않다. 4편의 연작 안 장면을 보면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시간의 순서가 없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선형적 시간은 자본에 의해 규정된 시간이다. 개인들이 시계를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때부터다. 시간이 곧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선형적 시간은 예상된 임금으로 이어진다. 영화에서도 시간이 느껴진다는 것은 예상한 결과로 안내받는 일이다. 청춘의 시간은 다르다. 시간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타날 때 ‘청춘’의 그 짧고 빛나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멈춰 있지 않다. 영화 안에서 청춘의 시간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지운 자리에 올곧이 공간이 드러나는데, 이때 진짜 시간이 등장한다.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봉제 공장. 카메라는 그 공간 안에 축적되었지만 드러나진 않은 시간을 드러낸다. 청춘들이 일하는 공장과 숙소는 흰 벽이다. 하지만 자세히 봐야만 흰 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쉼 없이 돌아가는 작은 공장 안 흰 벽은 까만 손자국 때와 낙서로 가득하다. 그 까만 손자국 흔적들이 벽 위로 축적되어 화면 앞으로 솟아난다. 청년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자는 그들의 숙소 흰 벽은 합판이 덧대어 있다. 이곳을 오고 간 수많은 청춘의 손자국을 견뎌내지 못한 흰 벽에는 칠하지 않은 합판이 덧대어 있다. 방 문짝과 덧댄 합판마저 셀 수 없이 많은 청춘의 주먹질로 부서져 있다. 때가 켜켜이 쌓인 공장과 기숙사 벽 얼룩, 파인 합판 벽과 문짝, 합판으로 덧댄 벽의 무너짐 위로 청춘의 시간이 나타난다.

돈을 갖고 도망친 사장을 찾아 사무실로 올라가는 청춘을 카메라가 따라간다. 공장 마지막 층 계단 모퉁이 쓰레기봉투들이 잔뜩 쌓여 있다. 이때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영화 앞부분에서 개를 안고 기숙사로 올라가는 청춘을 보았다. 쓰레기봉투 위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와 같은 개인지 알 수는 없다. 개 짖는 소리는 도망간 사장을 쫓아 계단을 뛰어올랐을 무수히 많은 노동자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복도 바닥의 쓰레기 너머 멀리에 검은색 의자가 놓여 있다. 쓸모가 다했는지 도망친 사장이 버리고 간 건지 알 수 없는 의자가 복도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공장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남은 천들, 언제 청소했는지 가늠할 수 없는 먼지 뭉치와 기숙사 바닥과 통로에 쌓여 있는 생활 쓰레기들, 함부로 놓인 의자가 시간을 드러낸다. 청춘이라는 찰나의 빛나는 시절을 포착하기 위해서 왕빙의 카메라는 청춘의 시간이 솟아오를 때까지 긴 호흡으로 기다리며 지켜본다.

공간이라는 주인공

<청춘(홈커밍)>

왕빙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의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에서와 달리 한명의 주인공을 내세워 서사를 따라가지 않는다. 카메라는 한 인물을 따라가다가 다른 인물을 만나면 그 인물을 따라가고 끝맺음 없이 그 공간 안의 또 다른 인물들을 비춘다, 즉 왕빙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공간이다. 역사적, 사회적 맥락 위에 드러나지 않는 공간에 카메라를 세우고 그 공간 안에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준다. 왕빙의 영화는 인물들로 기억되지만 공간에 관한 영화이고, 공간을 드러내기 위해 인물을 쫓는다. 인물을 쫓다 보면 사회의 구조적 모순 아래 드러나지 않는 공간이 드러나고 그 공간 속 존재들을 만난다. 사회가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않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역사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 공간을 주연으로 인간을 조연으로 설정한다. 폭력과 억압과 착취의 구조와 과정을 그 시대의 공간 안 모든 존재를 통해 드러내려 한다.

촬영 현장에서 왕빙은 녹화 중인 카메라의 버튼을 끄지 않는다.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가 인식되고 발견될 때까지 기다린다. <청춘>의 롱테이크 화면은 미싱을 돌리며 같은 노동을 반복하는 청년 노동자의 얼굴을 먼저 보게 만든다. 그다음 숙련된 손놀림으로 봉제를 하는 손, 그가 입은 옷, 낡거나 새것, 다양한 종류의 미싱들과 작업 중인 옷, 미싱 너머의 또 다른 미싱과 노동하는 다른 청춘들, 그 너머 공장 안의 갈라지고 지저분한 벽, 그 아래 봉제하다 버려진 천과 실, 솜뭉치, 먼지와 쓰레기들을 순서 없이 보게 한다. 공간, 장소가 주인공일 때 영화 속에서 스치는 모든 순간이 스스로 일어난다. 의도적이든 우연적이든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화면 안에 담긴 모든 존재들을 기다린다.

<청춘>에서는 아파트형 공장 사이의 길을 자주 보여준다. 아파트 위에서 청춘들이 담배를 피우며 서 있을 때 함께 내려보기도 하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청춘들의 뒷모습을 쫓아가며 공간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 안 청춘들이 일을 멈추고 갑자기 공장 밖으로 나간다. 공장 사장과 돈을 받으러온 누군가간에 싸움이 일어났다. 카메라는 그 광경을 보러 나가는 청춘들을 따라간다. 청춘들은 아파트 사이에서 돈을 받으러온 노동자를 때리는 사장을 지켜보며 피 흘리는 사람을 걱정한다. 카메라는 싸움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청춘들의 뒷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본다. 일상적으로 바라봤던 공장 건물 사이에서 싸움의 풍경을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뒤로 물러선다. 청춘들의 뒷모습을 통해 안전장치 없이 일하고 있는 청춘들의 불안한 현재를 보여준다. 거대한 봉제 공장 단지를 통해 청춘을 폭력적으로 짓누르고 있는 풍경을 담아낸다. 일반적으로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공간을 유기체로 연결한다. 공간을 연결하거나 지정학적 위치를 관객들에게 인지시키기 위한 장치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왕빙의 작품 속에서 인물이 걷는 장면은 공간을 분절한다. 분절된 공장 사이를 걷는 청춘들을 뒤따르는 카메라가 다른 청춘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일하지만 그 공간 속에 고립된 청춘 개인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청춘

<청춘>에서 청년들이 저임금의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짚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불안정한 사회적 약자로 청춘을 정의 내리고 규정할 때 놓치는 것들이 있다. 한 사회의 청춘은 그 시대의 모든 구조적 모순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구조를 해체하고 새롭게 다시 구축하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즈리진 봉제 공장의 청년 노동자들을 농민공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할수록 그들은 청춘과 멀어진다. 자본의 속박 안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다시 시작하는 다양한 청춘들은 사라진다. 이탈리아 영화감독이자 배우, 연극 연출가 겸 시인인 카르멜로 베네는 “민중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 극장은 민중을 재현하지 않는다. 극장은 민중이 발생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민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민중의 의미를 규정할수록 거기서 빠져나가는 것이 민중이다.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청춘들이 만든 풍경과 광장의 분위기는 우리가 규정한 청춘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들뢰즈는 자본과 권력에 종속되거나 포섭되지 않으려면 고정되지 말고, 계급이라는 안정된 구조 안에서 정착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고정된 계급이 아닌 창조 주체인 민중의 관점으로 봤을 때, 민중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타자가 될 수 있는 정체성으로 계속해서 변하는 존재가 민중이고 청춘이다.

왕빙의 작업은 촬영하고 있는 대상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가 영화를 만들고 촬영하는 방법도 규정할 수 없다. 그의 스타일을 굳이 말하자면 어떤 것도 규정하지 않으며 타자가 되고자 노력하는 카메라의 태도 그 자체가 아닐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민중을 맞이하며, 잠재된 것이 솟아나기만을 기다리는 그의 카메라야말로 ‘청춘’이다.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에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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