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마음에 안정을 주는 짤”이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이미지를 자주 본다. 종류, 색상, 크기별로 잘 진열된 판매대나 오와 열을 맞춰 정돈된 서랍장 등이 그렇다. 또 같은 제목임에도 반어적으로 다른 이미지를 노출하기도 한다. 음료수 캔이 배출구 앞에서 막혀버린 자판기라거나 바닥에 빽빽하게 들어찬 타일 중 하나가 색깔이나 모양이 다르거나 해서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거스르는 이미지다. 엇나간 타일 조각을 볼 때 정말 그 타일만 제자리에 놓으면 마음이 정화될 것 같다. 그래도 <서브스턴스>에 등장하는 오디션 심사위원이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의 분신 격인 수(마거릿 퀄리)를 두고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건 지독하다.
<서브스턴스>를 미추 관념에 근거한 에이지즘과 루키즘 비판으로 독해하는 일도 옳다. 다만 미추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규격, 정연, 정돈, 통제, 지침 등의 개념이 주로 작동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서브스턴스>는 특히 규격과 통제, 그리고 지침으로 점철돼 있다. 영화 초반은 고정된 부감으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서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자 엘리자베스의 이름이 담길 분홍 보도블록이 제작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주형을 잡고 속을 채운 뒤 넘쳐흐른 잉여분은 제거한다. 세월의 풍파와 함께 보도블록은 분홍빛이 퇴색하고 금이 가며 급기야 음식물로 더럽혀진다. 이 시퀀스는 엘리자베스의 인생을 함축할 뿐 아니라 영화 전반의 형식도 마찬가지로 흘러갈 것임을 암시한다.엘리자베스 스파클이 젊음과 아름다움의 강박 속에서 접한, ‘더 나은 나’를 생성하는 정체불명의 약물 키트와 암시장의 관리자는 규제, 통제, 지침의 총체다. 반듯하게 네모난 박스에서 나온 기구들은 정확한 수치로 재단돼 있다. 매일 맞아야 하는 안정제를 다룰 장비는 모듈 7개로 명확히 구분된다. 엘리자베스와 활성화 약물로 그에게서 분리돼 태어난 수가 섭취해야 할 음식물 튜브도 구분 선을 따라 정연하게 나뉜다. 엘리자베스과 수 사이를 넘나드는 호스에서 서로의 혈액은 균일한 속도로 서로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또 엘리자베스와 수는 관리자가 말하고 키트 속 사각형 카드가 알려주는 지침인, 활성화는 1주일만 지속하고 예외는 없으며 하루라도 어기면 균형을 되잡기 위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는 수칙을 지켜야 한다. 이 규격과 통제가 의도한 대로 이뤄질 때, 그러니까 지침대로 엘리자베스가 깔끔히 가공한 비밀 공간으로 가 박스를 가져오고, 활성화 용액을 몸에 주사한 뒤 ‘더 나은 나’ 수가 되어 매일 한줌의 안정제를 주입하고, 한시적이나마 젊음과 아름다움을 뽐내며 활기에 넘쳐 거리와 직장을 활보할 때의 리듬은 우리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반면 이후 영화가 쌓아올린 대오가 흐트러지고 파국으로 치달을수록 관객은 쾌감보다 불쾌감에 휩싸였던 듯하다. 다시 말해 희열은 명령과 복종의 고리 안에서 더욱 솟아난다는 것.
규격, 통제, 지침의 언어는 독재자의 언어이기도 하다. 광활한 광장에 오열을 맞춰 도열한 장병들, 사열 중인 군 무기와 일사불란한 군인들의 행동. 또 이것은 아름답기도 하다. 아니 아름다움을 강요한다.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 속 군중과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젊은 운동선수의 모습은 규격과 통제가 곧 미와 직결한다는 프로파간다임을 알지 않은가. 그렇다면 <서브스턴스>는 두 갈래로 바라볼 법하다. 먼저 감독은 규격과 통제로 수립된 파시즘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그간 제시한 규격과 통제의 설계를 파괴적으로 흐트러트리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고층의 안락한 주거지를 온갖 음식물과 쓰레기로 어지럽힌다. 매끈한 신체를 가르고 꿰매며 뭉그러트린다. 절정은 지침을 완전히 어김에 따라 신체 부위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붙어 있는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등장일 것이다. 새해 전야 쇼에서 수를 보려고 정렬된 좌석에 앉은, 비슷하게 정장을 한 청중을 향해 엘리자수는 피 대포를 난사하고 스튜디오 복도는 피로 물든다. 이렇게만 보면 영화는 루키즘, 에이지즘, 가부장적 응시로 뭉친 파시즘의 파멸을 뜻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안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새해 전야 쇼의 난장판 이후 엘리자수는 명예의 그 거리로 흘러들어간다. 몸은 다 망가지고 엘리자베스 얼굴의 형상만 포함한 핏덩어리가 그의 이름이 새겨진 저 별 모양 분홍 보도블록으로 다가간다. 별빛이 내리는 듯한 할리우드 밤하늘의 환상이 지나고 나면 다시 고정된 부감에서 그 핏덩어리는 마른 뒤 굳고 이내 청소 차량에 의해 깨끗이 씻겨나간다. 한밤의 꿈. 짧은 혁명. 또다시 찾아온 규제와 통제에 더해 청결의 지침이 그를 말끔히 없애버린 것이다. 역사상 늘 봐왔던, 기득권이나 파시즘을 향한 반격의 좌절. 그렇다면 이건 파시즘에 대항하는 메시지를 설파하는 작품인가. 반복돼온 역사의 재현일 뿐인가. 답은 규격과 통제, 그리고 지침에 쾌감이나 안정감을 느끼느냐 아니면 영화 후반부의 괴상한 전복과 흐트러진 대오를 더욱 추구하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규격과 통제, 지침을 필경 질서로 간주하고 속시원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질서의 매력 아닌가. 하지만 규격의 질서는 사실 단순함과 같은 말이다. 작품 속 활성화 키트나 익명의 관리자가 말하는 지침은 수행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쉽게 원위치할 수 있고 난해한 인간 내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힘들지 않게 준수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와 달리 굳이 규율을 어기고 정해진 안정제 투여 횟수를 임의로 변경하는 일은 막대한 에너지가 든다. 엘리자베스와 수처럼 분열증에 가까운 심리적 파탄에 이르지 않으면 행하기 힘들다. 또 이같은 균열과 파열은 일견 무질서, 무규칙, 무정부와 같이 질서가 없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고도로 질서정연한 상태일지 모른다. 우리가 규칙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무질서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떠한 법칙으로 우주가 작동하는지 모른다고 이미 아는 규칙에서 벗어나면 무질서인가. 이건 현실에서도 확인한 바다. 국회의사당 앞을 가로막은 제복 입은 사람들의 열은 단순한 획으로 그어져 있다. 그걸 지시한 사람이나 그 지시를 별생각 없이 복종한 지휘부는 사실 모두 단순하다.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받아 이행만 하면 되었다. 이 단순한 체계에서 어려울 건 없다. 그러니 ‘우리는 그게 잘못됐든 어떻든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을 깊은 성찰 없이 입 밖으로 낸다. 반면 명령의 소식을 듣자마자 집을 뛰쳐나와 장갑차 앞에 섰던 행동, 부상을 입어도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담을 넘었던 의지, 쉽게 제압할 수 있음에도 부러 밀려나줬던 양심, 엉뚱하게 휴게소로 들어가 라면을 먹었던 기지, 무정형의 응원봉을 흔든 생기는 고도의 사고가 필요한 일이다. 무질서가 아니라 고도의 질서 행위다.
당신은 영화 전반 규격과 통제, 그리고 지침 이행에 따른 일련의 장면에서 즐거움과 함께 이 안정이 무너질 후반을 예견하면서 불안감을 느끼며 내심 ‘질서 있는’ 엔딩을 바랐는가. 아니면 영화 후반부에서 시종일관 인상을 찌푸리더라도 규격과 통제의 틀이 흔들리고 관리자의 말을 거부하며 갈 데까지 가버리는 엘리자수의 모습과 행위를 보면서 어떤 흥분에 빠져들었는가. 시기와 사정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지겠지만 이번에도 후자의 심상이 현실에서도 발현돼 현상을 압도하고 정의를 바로 세웠기에 이 글도 실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