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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리타)의 장르의 감정] 통치도 복종도 없는, 해적 유토피아의 정치 실험과 해적 장르
이연숙(리타) 2024-12-25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

지면 연재는 정해진 글자 수를 지켜야 하기에 되도록 한 글자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마감에 쫓겨 주어진 공간을 엉성하게 운영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회차는 타임루프 장르에 대해 쓸 예정이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는 내 사정 따위야 원래대로라면 퇴고 과정에서 날려버려야 할 잡스러운 정보일 것이다. 지난 12월3일 오후 10시23분 이후 선포된 비상계엄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물론 나는 예정대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단지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을 뿐인 대통령 한 사람의 기행으로 이러한 말도 안되는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기이하게도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실은 결코 존재한 적 없을지도 모른다는 외설적 진실을 누설한다. 너무 많은 권력이 특정 인물, 특정 정당, 특정 기관에 주어져 있다. 초법적 국가 폭력이라는 합의된 역사적 교훈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우익 음모론 유튜브 중독자 그룹이 모여 간단히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잠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어딘가에 놓여 있었다. 단지 그들이 그러고 싶을 때 능히 그럴 수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더 많은 어둡고 끔찍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한편 우리는 그런 상상을 통해 이미 항구적 비상사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이고, 장애인이고, 빈민이고, 성소수자인 누군가와 겨우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위기를 서둘러 봉합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대신 우리는 처음부터 국가의 진보 서사로부터 탈락할 수밖에 없는 그 누군가를 향해 더 아래로 나아가야 한다. 퀴어 예술가 이반지하의 논평처럼 “위기는 곧 위기”일 뿐이지만, 적어도 위기로부터 배울 수는 있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주어진 법과 제도를 초과하는 무차별적 평등과 자유로 이뤄진 허무맹랑할 정도로 이상적인 사회를 요구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그렇다.

다소 갑작스러운 전환이지만 이상적인 사회를 언급한 김에 해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올해 부산 비엔날레의 핵심 텍스트가 되기도 한 <해적 계몽주의, 또는 진짜 리베르탈리아>는 고인이 된 아나키스트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미완성작이다. 비서구적 계몽주의의 한 계보를 18세기 마다가스카르 해적에게서 찾는 이 얇은 책은 해적들의 모험담이 그런 것처럼 어딘가에 존재했을지 모르는 유토피아에 대한 낭만적인 동시에 급진적인 상상을 부추기는 대항 역사적 ‘썰’에 가깝다. 이 ‘썰’은 “실제와 상상의 해적 왕국”으로 널리 알려진 ‘리베르탈리아’가 정말 존재했는지 어떤지를 따져 묻지 않는다. 다만 그 이름으로 불리진 않았을지라도 실존했던 것이 분명한 마다가스카르 해안의 해적 정착촌에서 노동계급 출신 해적 수천명이 마다가스카르 (특히 여성) 원주민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통치 방식과 재산 분배 방식을 실험”했음을, 어떤 의미에서 “최초의 계몽주의 정치”를 실현했음을 널리 공유하고자 한다.

<우리의 깃발은 곧 죽음>

사실 이러한 주장은 데이비드 그레이버에게서 처음 제출된 것이 아니라 아나키스트 작가 피터 램본 윌슨(하킴 베이)의 <해적 유토피아>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주창하는 역사가 피터 라인보, 마커스 레디커의 <히드라>에서 이미 역설된 바 있다. 서구 제국주의 초기 역사의 공식적 서술에서 숨겨지고 지워지는 노예, 농민, 선원, 해적, 범죄자와 같은 ‘아무것도 아닌’ 평민의 반항과 반란을 당대의 기록, 민요, 삽화, 설화에 의존해 기술하는 <히드라>는 18세기 초 해적선을 “뒤집어진 세계”라 표현한다. 요컨대 해적선 ‘바깥’의 지배 질서 논리가 거꾸로 뒤집힌 “민주적으로 동의된” 자립적인 규칙과 관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해적선의 선원들은 자신들이 ‘선장의 선장이 될 수 있다’는 조건하에 선장에게 한정된 권위를 위임했고 선장이 선장답게 굴지 않으면 어떤 이유로든 선장을 선장 자리에서 내쫓았으며 전리품이 무엇이건 공평하게 분배했고 지위에 관계없이 비슷한 금액의 호봉을 받았다.

해적선의 이러한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경향은 해적이 저지른 범죄를 미화하기 위해 동원된 변명이라기보다 단지 당시 해적선 ‘바깥’이 얼마나 폭압적인 위계질서를 따르는 처참하게 불공평한 사회였는가를 말해주는 증거에 가깝다. 많은 노동계급 선원들이 질병, 사고와 재해, 임금 체불, 충분하지 못한 식사, 강제 징병, 즉각적 처형과 가혹한 처벌과 같은 “불행하고 절망적인 조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키거나 선박에서 탈출했으며 어떻게든 먹고살기 위해 해적이 되기를 택했다. 실업자와 탈주자로 이뤄진 해적선은 그러므로 평등과 분배를 원칙 삼아 운영되는 (피터 램본 윌슨의 말에 따르면) “임시 자치 구역 프로토타입”이었다. 모험의 자유와 위험의 책임은 해적들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가지는 일종의 공동 자산이었다.

오늘날 대중문화 속 지배적인 해적의 형상을 떠올려보자면 이러한 주장은 어리둥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해적은 만화 <원피스>의 밀짚모자 해적단이다. 선장인 루피는 군주적 리더십으로 ‘해적왕’이라는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동료를 선발하고 전투에 차출한다.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해적선 내 위계 구조는 잔인할 정도로 명확하다. <캐리비안의 해적> 역시 유명한 해적 프랜차이즈다. 잭 스패로우라는 인물의 캠피한 매력과 복종하지 않는 자유로운 행동을 통해 황금기가 저물어가던 18세기 카리브해에 어쩌면 존재했을지도 모를 해적의 삶을 낭만적으로 재현한다. 하지만 민주적 연합의 가능한 형태는 단독 행동하는 그의 관심이 아니다.

한편 최근 다음 시즌 제작이 취소된 <HBO> 시리즈 <우리의 깃발은 곧 죽음>은 평등하게 오합지졸인 해적들의 삶과 사랑을 퀴어 하위 문화 코드를 전유해 그린다. 철모르는 은퇴 귀족이자 ‘복수호’의 주인을 제외하고 더 많은 책임이 주어질 뿐인 선장 자리를 탐내는 선원은 아무도 없다. 그저 배불리 먹고 마시고 싶을 뿐인 이 엉망진창인 해적 돌봄 공동체로부터 유의미한 대안적/대항적 시스템을 추출하는 건 솔직히 말해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통치도 복종도 없이 이 “임시 자치 구역 프로토타입”은 어떻게든 굴러는 간다. 악명 높은 ‘검은 수염’을 학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드랙킹’으로 표현한 이 시리즈는 비록 미완결작으로 남겠지만 우리로 하여금 위장과 은닉, 파편과 잔해의 형태로 도착한 해적 유토피아의 역사를, 이를테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과 세계를 꿈꾸고 원하게 만드는 상상적 유산이자 촉매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해적 장르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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