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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역사의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 <한 채>

영화 <한 채>에 대한 소개는 ‘집 한채를 얻기 위해 위장결혼에 나선 가난한 이웃을 건조하게 그린 영화’로 요약된다. <한 채>는 부동산 문제를 소재로 삼은 다큐멘터리 시선의 영화로 호평받으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2관왕에 올랐다.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 채>는 부동산 문제는 맥거핀으로 활용했을 뿐, 주제는 기독교적 가부장제 혼인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이다.

1. ‘부동산 영화’가 아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드림팰리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은 부동산 문제를 통해 계급적, 사회적 갈등을 파헤치는 ‘부동산 영화’로, 부동산 난제와 부동산을 둘러싼 욕망을 구체적으로 그린다. <한 채>는 신혼부부 특별공급을 노린 위장결혼을 소재로 사용했지만, ‘부동산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듯하지만, 청약 사기를 엉터리로 묘사하며 ‘엉터리니까 믿지 말라’며 일부러 모순을 드러낸다.

브로커가 생면부지인 도경(이도진)과 고은(이수정)을 매칭해 위장결혼으로 신혼부부 특별공급에 넣었다. 도경은 어린 딸을 키우는 이혼 남성이고, 고은은 지적장애가 있는 미혼 여성으로 아버지 문호(임후성)의 돌봄을 받는다. 위장결혼을 위해 동거하던 중 아파트가 당첨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단다. 도경이 문호에게 말하길 “분수에 안 맞는 집”이 되었단다. 아니 어떻게? 애초에 청약은 평형별로 넣어서 큰 평수가 당첨되기가 불가능하며, 신혼부부 특별공급은 큰 평수가 아예 없다. 영화는 ‘양심적이게도’ 문호가 판교 부동산에 들어가 시세를 묻는 장면을 보여준다. 문호가 “방 2개짜리는? 3개짜리는? 4개짜리는?” 하고 순차적으로 묻는다. 왜 필요도 없는 방 4개짜리까지 물었을까. 이 장면은 부동산이 아득히 비싸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단지에 방 4개짜리는 없다”라는 답변을 듣기 위해 중요하다. 즉 “분수에 맞지 않는 집이 되었다”라는 도경의 말은 헛소리란 뜻이다(사기 대목은 엉터리니까 믿지 말라고요~).

이상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애초에 문호 부녀와 도경이 브로커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위장결혼 이야기만 했을 뿐, 당첨된 후 무엇을 어떻게 하기로 한다는 말이 죄다 생략되어 있다. 그러니 나중에 문호가 “우리가 원래 하기로 했던 것을 하라”고 도경과 브로커에게 주장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관객은 알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당첨된 집이나 브로커가 도경에게 챙겨준다던 2억원 등도 결국 어찌되었는지 오리무중이다. 도경과 고은의 관계에 정신이 팔려, 위장결혼의 목적이자 원인이던 부동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요컨대 부동산은 맥거핀일 뿐이며 부동산을 통해 하고픈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고, 부동산 문제의 신산함을 논하는 이는 ‘낚인’ 것이다.

2. 아버지가 딸을 남자에게 떠넘기다

정말로 하고픈 이야기는 위장결혼으로 시작된 ‘관계’다. 여기까지는 다들 동의할 것이다. 혹자는 이들이 결국 ‘하우스’가 아닌 ‘홈’을 갖게 되었다며 축복하고 감동한다. 그전에 이들의 ‘관계’와 ‘홈’이 과연 바람직한지 뜯어봐야 하지 않을까.

첫 만남에서 브로커는 둘이 같이 사는 것은 “안 급하고” 당첨된 후에나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결혼사진을 찍자 곧바로 고은 부녀가 도경 집으로 들어간다. 지적장애가 있는 고은에게 부부처럼 보이는 걸 학습시킨다는 명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뭔가 정해진 수순마냥 거침없이 동거에 돌입했단 생각이 들지 않나. 더욱이 문호는 지적장애 딸을 단지 며칠 같이 지낸 사내에게 맡기고 홀연히 떠난다. 이때 문호의 믿음과 욕망과 의지는 무엇인가.

앞의 옷가게 장면을 눈여겨보라. 문호는 고은에게 장애인 목걸이를 걸어주고 고은이 혼자 가게에 들어가게 한다. 고은이 옷을 사달라고 떼쓸 때, 문호가 들어가 흥정하면 왕창 깎을 수 있다. 부녀에겐 ‘놀이’처럼 익숙해 보이는데, 타인의 선의에 기대(하)는 수법이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요약본이다. 문호가 ‘가게 놀이’ 대신 ‘소꿉놀이’를 하라고 고은을 도경 집에 혼자 들여보낸 뒤 도경이 기대했던 선의를 보이자, 문호가 자신이 의도했던 어떤 거래(?)를 마친 상황이 아니겠나. 애초부터 문호가 원했던 건 ‘고은을 도경에게 떠넘기기’였음을 옷가게 장면이 암시한다.

3. 기독교적 가부장제 혼인 모델

<한 채>는 아버지가 딸을 나빠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넘겨주는 (‘시집보내기’) 가부장적 혼인 모델을 재현하는 영화이다. 여기에 여러 미화 장치를 덧댄다. 딸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딸은 경계성 지적장애인으로 설정되었다(장애와 여성의 이중 혐오다). 문호가 도경의 선의를 기대할 수 있는 구석은 ‘부성’이다. 즉 ‘너도 딸 키우는 아버지’로서 자신이 애지중지 키운 딸을 막 대하지 않을 거란 믿음. 도경이 어린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경에게 고은은 보통 아내와 딸의 중간쯤 되는 존재로 설정된다. 도경과 고은 둘이 남았을 때, 도경이 고은을 막 대하지 않은 것은 문호의 그림자 때문이다. 도경은 문호를 동일시하고 의식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남성은 부성(애)적 주체이고, 여성은 보살핌을 받고 순종해야 하는 객체이다.

영화 전체로 보자면 문호의 의지가 일관적으로 관철된다. 가족사진을 한사코 찍지 않으려던 문호는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딸의 의식과 행동을 ‘놀이’ 개념으로 간단히 제어한다. 새벽에 막걸리를 사온 문호는 두 사람을 앉히고 “지금부터 소꿉놀이를” 명한다. 이 장면에서 문호는 카메라를 등지고 앉아 있는데, 마치 혼인을 주재하는 사제 혹은 신처럼 보인다. 문호의 교도소 장면은 느닷없지만(앞의 대리운전 싸움이 복선으로, 브로커 폭행 등이 암시된다), 어쩐지 거룩한 ‘희생’인 양 느껴진다. 쇠창살이 ‘십자가’처럼 정면 가운데로 찍히고 새소리가 크고 길게 들어가 종교적인 느낌을 물씬 자아낸다. 도경은 도시 일을 접고 하필 ‘포도원의 일꾼’이 되는데, 그 포도원이 고은이 큰아버지 농장이니, ‘장가들기’가 된 셈이다. 기독교적 가부장제의 시집가기와 장가들기가 실현되었다.

도경이 1억원 전세방을 빼서 누나 집의 5천만원 전세금을 올려주는 데 보탰는지, 누나는 이사하지 않았다. 도경 누나가 여전히 도경의 딸을 키우며, 여기에 고은까지 보살핀다. 그러나 이것을 대안 가족이나 유사가족으로 볼 수는 없다. 가부장제 시집가기와 장가들기가 이루어지고, ‘동기간에 우애 있고’(누나가 돌봄을 떠안는) ‘성별 분업’이 이루어진, 확대가족 형태로 볼 수 있다. 영화는 도경과 고은이 문호의 면회를 마치고 함께 차에 오르는 것을 끝으로 이들이 곧 정상 가족을 이루리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기독교적 가부장제 혼인의 원형 복원 염원이 낭랑하다.

한국 남성들의 역차별 피해망상을 노골적으로 전시한 영화 <파일럿>이 470만 관객을 동원한 데 이어, 영화 <한 채>가 백래시 광풍을 어질어질하게 환기한다. 그러나 시대착오적 쿠데타가 진압되었듯이, 백래시도 꺾일 것이다. 반동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도, 역사의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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