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보다 큰 것에 맞서려는 사람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그럴 때 자정의 침대는 나의 사소함을 곱씹게 되는 감옥이 된다. 겨우 맨발을 밖으로 빼내어 정적 속 거실에 홀로 선 당신은 외면과 불면을 맞바꾼 셈이나 다름없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기로 하는 순간 고통도 배가 된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적응하기까지 약간의 필연적인 과도기가 펼쳐진다. 한 사람의 양심이 계류하는 시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석탄 상인 빌 펄롱(킬리언 머피)에 비추어보자면 그 과정은 혼란스럽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빌은 석탄광에 감금된 미혼모 소녀를 만난다. 일단 데리고 나올까 고민도 했지만 그는 지역사회에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수녀원장의 압박에 못 이겨 결국 홀로 돌아나온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회가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이름으로 미혼모 여성들을 감금, 착취한 역사에 바탕한 이야기다. 그 폭력을 다 보고도 그냥 걸어나왔다니! 빌은 그날부터 밤마다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이 무렵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동명의 소설에는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머뭇거림이 깃든다. 남자는 길을 가다가 상념에 젖거나 새벽녘 깨어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며칠째 뭔가 가슴에 얹힌 것” 같은 증상에 시달린다. 크리스마스 미사를 위해 성당으로 걸어갈 땐 “어쩐지 거부감도 느낀”다. 겉보기엔 여전히 견고한 일상 속에서 빌 펄롱은 제 몫의 고민으로 흔들린다. 늦은밤 자주 거리를 배회하기도 하면서. 인간성, 도덕의식, 양심? 무어라 부르든 무언가 깨어나고 있는 시간이 틀림없다. 2024년 12월4일, 비상계엄령이 해제된 당일, 정상 진행된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는 동안 나는 어젯밤 완전히 부서질 수도 있었던 빌 펄롱들의 사소한 일상을 재감각하고선 아찔해졌다. 한 개인이 자신의 신념과 실천을 가다듬어나가는 인생의 기회. 그토록 희귀한 축복이 어리석은 권력자의 농단으로 순식간에 침탈될 수도 있겠다고, 나 자신의 위태로운 일상을 스크린에 묻히고 말았다. 얼떨떨한 한나절이 겨우 지나가는 중이었다.
내면의 요청이란 한없이 연약한 것일 수도 있지만 깜짝 놀라울 만큼 질길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의식이 변화하기까지의 치밀한 전투를 담아낸 소설 속 문장을 옮기기 위해 팀 밀란츠 감독이 개발한 이미지는 빌 펄롱의 집 복도에 있다. 화자의 심리와 윤리적 딜레마가 정확한 언어로 서술되지 않는 영화의 공백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감독은 주인공의 거처를 공들여 짓고 현관문에서 부엌까지 이어지는 좁은 복도에 삼각대를 세웠다. 복도 숏은 한 사람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시각화하는 동시에 효과적인 반복을 위한 믿음직한 도구가 되어준다. 우리는 저녁에 귀가한 빌 펄롱의 뒷모습을 따라 복도를 지나면서 한 남자의 평온한 일상을 확인한다. 언제든 불을 밝히고서 빌을 기다리는 저 너머 부엌의 소란과 온기에 안심하기도 한다. 동시에 어떤 날의 복도는 더이상 삶을 답습하고 싶지만은 않은 주인공을 짓눌러, 타인을 돕는 일에 기꺼이 나서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마침내 빌이 소녀를 구출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복도를 통과하는 뒷모습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다.
소설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서 클레어 키건은 이렇게 쓴다.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영화가 끝난 뒤 뒤늦게 소설을 열어보고는 가슴 한쪽이 얼얼해진 문장이었다. 양심적 행위가 자신의 안위를 저해할 때, 한낱 개인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우직한 크리스마스 모험담이 들려주는 것처럼 두려움 속에서도 무모할 수는 있다. 인간의 이런 특성은 그동안 용기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불려왔다. 특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급되는 용기는 자주 희생과 헌신, 비장함의 숙명을 띤다. 그런데 키건의 묘사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맑고 부드럽다. 그는 여기서 무려 순진한 낙관을 언급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어떻게든 해나가리라”의 심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두 사람은 막달레나 세탁소의 석탄광에서 출발해 빌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시내 한가운데를 통과한다. 석탄과 오물에 더럽혀진 맨발의 소녀와 걷는 동안 빌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알면서도 꿋꿋이 나아간다. 영화와 달리 소설은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위에서 끝이 나는데, 이 대목의 묘사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는 동안 나를 뒤흔든 질문에 대답이 되어주었다.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도 정확히 알고 있다. 앞으로의 투쟁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걸. 영화 속에서 빌이 현관문을 열고 소녀와 함께 복도에 선 순간에, 자신을 기다리는 부엌의 불빛 속으로 천천히 향하는 순간에 그의 등 뒤로 새어나온 힘은 강인함이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사소한 일상을 향해 새 동료를 데리고 걸어가고 있었고 카메라는 종전의 그 자리에서 여전한 저녁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가장 좋은 부분을 끌어다 썼기 때문에, 그것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닥쳐오는 두려움 속에서도 담담히 자신이 믿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음을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석탄, 토탄, 무연탄, 분탄, 장작을 자루 가득 넣어 마을을 오가는 남자가 그해 크리스마스에 전한 선물이 지금 한국의 거리에도 분주히 배달되고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고 마주한 첫 주말에 나는 자신의 가장 좋은 부분을 꺼내어 쓰는 사람을 수없이 보았다. 국회 앞에서 빛을 내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다른 사람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마실 것을 내어주는 사람들. 다수의 혼돈 속에서도 소수자의 마땅한 자리를 일깨우는 사람들. 분명 두렵고 비탄하지만 앞으로 어떻게든 해나가리라고, 돌아가는 지하철역에서 그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