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11월29일)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스페셜 가창곡인 <행복의 나라로>(작곡·작사 한대수, 노래 양희경) 음원이 공개되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첫 상영 GV에서 노래를 불러주신 것을 계기로 추진된 이벤트라 들었어요.
글쎄, 제가 여간해선 어디 나가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데 그날은 그렇게 되더라고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아침바다 갈매기는>이라는 제목을 보고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 <바다>가 생각났어요. 그 노래가 이렇게 슬픈 가사였는지 제대로 느끼게 된 거죠. 노랫말처럼 고기잡이 배가 만선이 되어 돌아오는 일이 어디 흔하겠어요. 가사는 금빛과 행복을 싣고 나가는 배를 노래하지만, 어떤 배는 저녁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니까. 알고 보니 감독님도 그 노래를 생각하며 제목을 지었대요. 난 그걸 몰라서 GV 때 감독님한테 질문했다가 요즘 관객은 이 노래를 모른다고 해서 흥얼거리며 불러주게 된 거죠. 그걸 보고 박이웅 감독이 이렇게 새로 녹음까지 시키고….
- 판례로서 부른 노래이니 유명한 곡이라도 감정이 남달랐을까요.
우리 언니(양희은)처럼 더 깊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불러야 할 노래 같은데 처음엔 내 소리가 너무 가볍게 들려서 마음에 안 들었어요. 최대한 감정을 담아 곡진하게 부른 버전과 단정하고 깨끗하게 부른 버전 몇개로 나눠서 보냈죠. 그런데 영화 만드는 사람들 보는 눈은 확실히 달라요. 판례(양희경)의 그 주름진 얼굴이 나오는 뮤직비디오에 가장 담담하고 맑게 부른 버전을 입혔더라고요. 노래와 영상의 묘한 균형감에서 오히려 극대화되는 감정이 있다는 걸 저도 뒤늦게 알겠더라고요. 영상을 본 언니도 좋다고 하고. 사실 녹음실에서 그렇게 울컥하고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혼났어요. 내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청년이 부르는 <행복의 나라로>가 아니고, 인생 다 산 사람의 노래처럼 느껴져서였을까요. 모든 인생이 각자의 행복을 꿈꾸며 살지만 그것이 늘 이루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행복도 고통도 찰나의 순간인데 다만 불행한 건 오래 남고 행복한 건 특히 눈뜨면 사라지니 서글프죠.
- <불도저를 탄 소녀>로 데뷔하고 두 번째 장편을 준비 중인 젊은 영화감독 박이웅과의 만남.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감독에 대한 신뢰는 처음부터 있었어요. 조용하면서도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그런 의미에서 ‘독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할까. 실제로 현장에서도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차분히 작업을 이끌어갔어요. 2023년 3월부터 5월까지 촬영했는데, 그 후로 한동안 소식이 없기에 그땐 걱정을 했죠. 왜 요즘은 찍다가 엎어지거나 완성해놓고 편성 안되는 드라마가 많잖아요. 이 영화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 대본인데 하는 노파심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올해 1월에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감독님이 찾아왔어요. 연락도 못했는데 TV 뉴스를 보고 감독님 어머니가 알려주셨다나.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영화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고 물었더니 열심히 편집 중이라고 해서 안심했고(웃음) 9월에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선생님이 ‘집밥 여왕’으로 불린 예능프로그램 <볼 빨간 당신>에서 노모를 위해 정성스레 밥 짓는 모습을 많은 시청자들이 좋아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밥 드시고 저녁까지 너무나 잘 계시다가 주무시던 중에 가셨어요. 딸 셋이 전부 임종도 못 봤지요.
-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을 때 선생님이 레드카펫 걷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개막식날에는 오지 못하셨다고요.
박이웅 감독이 레드카펫 밟으러 오라고 이야기할 때 “내가 주인공도 아닌데 무슨 레드카펫이냐”고 했죠. 결국 드라마 스케줄 때문에 가지 못했어요. 생각해보니 남은 인생 동안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을 일은 없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레드카펫에 못 섰다고 생각하면 좀 아쉽지요. 내 나이에 주인공으로 무언가를 할 기회는 더더욱 없을 테고. 그래도 현장에서 관객하고 만났으니 그걸로 족해요.
- <아침바다 갈매기는>에 딱 한번 모두가 모여서 밥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앞서 윤주상 배우는 인터뷰에서 영국(윤주상)이 판례 집에 가서 집밥 얻어먹으며 식구가 됐다고 표현하셨죠. 마침 선생님의 에세이 <그냥 밥 먹자는 말이 아니었을지도 몰라>가 올해 나온 터라 부엌 장면이 예사로이 보이지가 않았어요.
그게 영화에서 특히 아들 용수와도 딱 한번, 식탁에 앉아서 밥 먹는 장면이기 때문일 거예요. 나는 이번에 용수 역의 박종환 배우를 만나서 참 좋더라고요. 그 사람 특유의 멜랑콜리함이 있죠? 약간 우울하고 앞날이 보이지 않는 그런 인물을 참 잘 표현했습니다. 같이 밥 먹는 장면 이후엔 마지막에 영국이 도망친 용수를 데리고 와서 다시 만나게 해주는 장면이 중요했어요.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판례 입장에서는 이미 아들이 죽은 거나 다름없는 거죠. 문이 열리는 순간에 아들을 바라볼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 용수가 남길 보험금에 대한 소식이 마을에 퍼지자 “판례가 폐지 주워 나보다 돈 더 모았다”고 시샘하는 마을 주민도 있습니다. 평생 추위가 떠나지 않는 집에서 고생하며 살았지만 판례는 베트남에서 온 며느리를 자기 성씨로 바꿔 부르고 보험금도 그 앞으로 해두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대단하죠. 내가 갖지 못한 훌륭함이 그 사람에게 있었어요. 우리는 둘 다 엄마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판례는 보통의 엄마들을 넘어서는 존재예요. 젊어서 시댁에서 쫓겨났을 때 아들을 바로 자기 호적에 올리고, 며느리에게도 자기 성을 주고 보험금도 넘겨주는 게 보통 성품은 아니라는 걸 말해주지요. 특히 여성에 대한 생각이 깨어 있는 거예요. 외국인이나 며느리라든가 하는 정체성을 따지기 이전에 여성 대 여성으로 대한다고 봤어요.
- 판례 캐릭터를 놓고 보자면 대화보다도 침묵 속에서, 비언어적 표현으로 가슴을 툭 건드리는 대목들이 있는데요. 용수가 떠났으니 자기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냐고 묻는 며느리 영란의 등을 세게 내리치는 장면이 특히 그랬습니다.
신기하게 다들 그렇대요. 우리 아들도 그 장면이 가장 좋았다고 그러고. 아마도 인생의 은유가 함축되어 있는 풍경이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힘겹게 언덕을 올라가고 있고 다리는 아프고, 앞으로는 구르마를 끌면서 옆으로는 며느리를 끌고 가는… 힘겨운 인생의 조건이 다 담겨 있는 설정이지 않은가 생각해봐요. 그런데 사실 그 장면은 배우로서 참 어려운 순간이기도 했어요. 일단 촬영 초반이어서 상대 배우와 아직은 낯선 상태였고 의사소통도 쉽지 않았죠. 해는 저물어가는 급박한 상황이어서 속으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제게도 만족스러운 장면이 됐어요.
- 영화 말미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아들 부부를 따라 나서는 선택을 하는 엄마들도 있을 겁니다. 판례는 자기 자리에 남기로 해요.
판례는 원래 이 마을 사람이 아니에요. 아들과 타지를 전전하다가 지금에 이른 사람이죠. 전 판례의 선택을 아주 명확하게 이해했어요. 앞서가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니까요. ‘둘이 살아야지, 그들의 인생. 나는 여기 이웃들과 살고 너희는 둘이 살아라’ 이런 마음이었을 거예요.
- 다음날 아침에 판례가 떠났는지 확인하러 온 영국과 판례의 짧은 대화가 압권입니다. “갔어?”, “갔지 그럼!” 대사는 이 두 마디뿐인데 그보다 무수한 말을 주고받는 둘의 눈빛이 있어요.
그렇게 짧고 함축적인 대사여서 너무나 좋았지요. 바닷마을 사람들답게 겉은 투박하지만 속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판례의 말 속엔 그동안 이 소동을 성사시키기 위해 고생한 영국을 향한 박수가 담겨 있다고 봤어요. 그리고 이제 마음 놓아도 좋다고 영국을 안심시켜주고 싶었을 겁니다.
- 영화 촬영으로 지방에서 합숙하는 일은 어떠셨어요. 매일 출퇴근하는 연극무대와 드라마 현장, 라디오 부스를 오고 가는 것이 좀더 익숙한 지난 세월이었을 텐데요.
사실은 내 가장 큰 걱정이 그거였죠. 체력적인 면에서 잘할 수 있을까 하고요. 영화 촬영 막 준비할 때 다리가 많이 안 좋았어요. 판례와 닮았죠. 박이웅 감독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나는 오히려 판례가 류머티즘 관절염 환자라 구르마를 끄는 설정을 잘 소화하는 게 체력적으로 더 부담이었어요. 판례로서 살아가려면 구르마 끄는 동작이 아주 익숙해야 하잖아요. 내 진짜 다리 하나 제대로 건사하기 힘든데 말 안 듣는 다리가 하나 더 있는 기분이랄까. 녹록지 않은 몸과 부딪히다보니 자연스럽게 이 영화가 포괄하고 있는 인생의 복잡한 주제들도 더 피부에 스며들었어요. 빈곤한 독거노인들, 다문화가정, 보험사기, 마을 커뮤니티 의 갈등 같은 것들 말이에요.
- 양희경 하면 떠오르는 연극 <늙은 창녀의 노래>와 <자기 앞의 생>처럼 거리에서 온몸으로 인생의 풍파를 부딪치며 살아온 여자들이 선생님의 적역이었습니다. 나이를 따라 여러 엄마 역을 맡긴 했지만 그전엔 자기답게 사는 고모나 이모 역이 더 어울렸고요. 개성 있는 중년 역할로 영화계에서 여러 번 러브콜을 보냈을 법한데요.
배우 일 잘하는 것만큼 아들 둘도 잘 키우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가장 힘든 게 영화 촬영이었죠. <아침바다 갈매기는>만 봐도 그렇잖아요? 집 밖에서 수일을 지내야 하는데, 아침에 애들 도시락 싸주고 학교에 보낼 사람이 없어지는 거죠. 이번 영화를 본 아들들이 너무 좋대요. 그러면서 “엄마 왜 진작 영화를 안 했어?” 하는데 대뜸 “니들 때문에 그랬지!” 하는 말이 나오더라니까요. (웃음) 그러다보니 ‘양희경은 영화를 못 찍는다’는 소문이 났죠. 저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했어요. 드라마와 무대, 10년간의 라디오 진행…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고 한편으로는 영화에 대한 갈망을 일찍 접기도 했어요. 살면서 때로는 단념도 필요해요. 그러다 이렇게 기회를 만나면 행복한 거죠. 이상하게 <아침바다 갈매기는>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건 내 역할이다, 싶었거든요.
- 스크린에서 오랜만에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감흥은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우리 아들이 “TV를 통해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엄마의 영역”이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매체마다 필요한 에너지가 달라요. 무대 위, 영화, 그리고 드라마의 에너지가 다르죠. 어쩌면 저는 드라마보다는 무대나 영화쪽이 더 잘 맞을 수도 있어요. 영화는 컷과 컷으로 만들어지고, 드라마는 신 단위로, 연극은 통째로 만들어지거든요. 말하자면 영화가 훨씬 디테일하게 내 표현을 정확히 보여줄 수 있어요. 대신 그만큼 무서운 면도 있죠. 아무리 애써도 가짜로 꾸민 부분이 바로 티가 나니까요.
- <아침바다 갈매기는>을 보면서 어떤 이야기는 캐릭터와 배우의 특정한 나이대, 그 세월의 무게가 쌓여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요즘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아쉽게도 나이 든 배우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40대 초반의 엄마 역할을 50대 배우가 하는 식이죠. 사극만 봐도 그래요. 예전엔 중전과 대왕대비 역할을 맡은 각 배우가 실제로 나이 차가 확 났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점점 사라지고 있달까. 과거엔 배우가 부족해서 청년 배우가 노역을 많이 했다면 이젠 그렇지 않아요. 배우 층이 훨씬 두터워졌거든요. 극 중 인물의 세대가 풍성하고, 그 역할이 실제 나이대가 잘 맞는 적합한 배우에게 돌아가서 각자가 더 빛났으면 해요. <아침바다 갈매기는>이 좋은 선례가 되어야 할 텐데 (맞은편에서 기다리던 고집스튜디오의 안병래 대표를 가리키며) 고생한 우리 안 대표 빚만 질까봐…. (일동 웃음) 그래서 열심히 나가고 챌린지도 하고(윤주상, 양희경 콤비가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를 따라했다.-편집자), 시키면 노래도 부르고 그러는 거죠. 의미를 넘어 좋은 성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