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 하던가. 배우 김이경이 자신의 배역인 희진을 “~한 친구”로 거듭 지칭할 때마다 인물을 대하는 배우의 태도가 명확하게 전해져왔다. 그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던 대답과 인물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도 분명 촬영장 안팎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그 친구의 모습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겉으로는 강단 넘치지만 사건의 당사자인 기정(이하은)만큼이나 외로웠을 고등학생. 유정(박예영) 자매에게는 온전히 기댈 수 없는 타인이자 동시에 누구보다 애틋한 동료였을 수수께끼의 인물. 이제 용기를 내보려는 희진의 손을 꼭 잡은 채, 김이경은 오랫동안 동경해온 스크린 속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 <언니 유정>으로 처음 장편영화의 주연을 맡았다.처음 배우를 꿈꿨을 때부터 이 큰 스크린에 내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제대로 나를 알릴 수 있는 영화가 드디어 나왔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다. 지난봄 <언니 유정>으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는데, 영화제 초청도 레드카펫도 모두 처음이었다. 영화제를 찾아주신 분들의 에너지를 느끼며 내 텐션도 덩달아 같이 올라가더라. 너무나 즐겁고 개인적인 의미가 큰 경험이었다.
- <언니 유정>의 오디션 과정은 어땠나.첫 오디션 당시 기정과 희진 몫의 대본을 모두 받았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희진이라는 친구에게서 큰 매력을 느꼈다. 이전에는 연기해보지 못했던 성격의 친구여서 더 욕심이 나기도 했다. 이후 전체 시나리오를 받은 뒤 감독님이 어느 배역을 맡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내 대답은 역시 희진이었다. 무엇보다 희진도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몫을 분명하게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확고해졌다.
- 그렇다면 김이경 배우가 느낀 희진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희진은 어른들에게 도움을 받고 의지하고 싶지만 쉽게 그럴 수 없는 친구였다. 그런데 기정이가 연루된 사건을 통해 언니 유정을 만나며 ‘어른을 한번 믿어봐도 될까?’ 하며 조금씩 손을 내밀어보려는 용기를 갖게 된다. 변화하는 희진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도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 자신을 깨고 나오려는 희진의 내적 용기도 대단하지만 한참 연장자인 유정을 향해 당돌하게 윽박지르는 등의 표면적 용기도 탁월하다. 이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걸까.
희진이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다 보니 자연스레 날이 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어린 친구이고, 부모조차 자신을 존중하지 않을 텐데 어느 누가 자신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아직 마음이 열리지 않은 상태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유정에게 날카로운 말을 내뱉지 않았을까.
- 그렇다고 희진이 거짓말을 잘하는 성격도 아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유정이 눈치채도록 일부러 말을 흘리는 걸까 싶은 의문도 든다.
사실은 희진도 도움을 절실히 원했을 것이다. 기정을 알아가려 노력하는 유정의 모습을 보며 한번 용기를 내보자는 생각과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말을 못하겠다는 고민이 충돌했을 것이다. 그 속에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봐 달라는 간절한 마음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연기를 하면서도 희진이 철두철미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아주 뻔뻔한 사람으로 표현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 영화에 유독 얼굴 클로즈업이 많다. 사지의 활용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표정과 대사로 모든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나.
대사도 그렇지만 표정이나 눈빛에서 나오는 메시지를 감독님이 연출적으로 바란 지점도 있다. 대본에서 그런 디렉션이 적힌 지문을 만날 때마다 장면에는 드러나지 않는 여러 서브텍스트를 적어 내려갔다. 희진이가 이쯤에서 했을 생각이나 하고 싶었지만 미처 하지 못한 말 등이 무엇이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 그렇다면 희진에 대해 고안했던 각본 바깥의 설정이나 아이디어도 있었을까.
영화에는 직접적으로 그려지지 않지만 부모와의 친밀도가 높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통의 부재도 있었을 테고. 또 외동이었기에 더욱 큰 외로움 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래서 희진이가 가장 기댈 수 있었던 존재가 바로 기정이 아니었을까. 비록 여러 사건으로 인해 멀어졌지만 기정에게는 자신의 모든 마음을 준 채 사랑을 갈구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직접적인 표현은 잘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 희진과 기정이 대화하는 과거 시점의 장면 속에는 현재 시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진의 천진한 모습들이 자주 비친다. 평범한 고등학생 희진의 모습은 어떻게 만들어갔나.
6개월 전의 과거를 담은 장면들에는 정말 한치 앞도 모르는 천방지축 여고생의 분위기가 듬뿍 담겨 있다. 내가 97년생, 하은이가 빠른 98년생이라서 서로 동갑내기 친구다. 기정에 대한 희진의 마음을 만들어가는 과정보다는 그저 하은이가 기정이 그 자체로 느껴지는 순간이 오더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찐친’ 바이브가 묻어나오지 않았나 싶다. 하은이와 함께 연기하면서 나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희진이는 기정이와 함께하는 순간들이 무척 행복했을 거다.
- 그간 드라마에서 자주 얼굴을 비추었다. 호흡이 가쁘기로는 최고라 할 수 있을 일일연속극에도 두 차례 출연했는데, 드라마의 작업 방식과 영화의 작업 방식은 어떻게 다른가.
영화는 시나리오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완성된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덕분에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신 한신 연결고리를 생각하며 연기할 수 있다. 반면 드라마는 뒤 화 대본이 촬영하다가도 나온다.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맡은 역할의 감정선을 그때그때 찾아가는 매력이 있다.
- 지난해 드라마 <오늘도 사랑스럽개>에서도 미스터리한 면모가 돋보이는 고등학생 민지아 역을 소화했다. 다양한 나이대의 역할에 대한 갈증도 있을까.
고등학생 역할은 맡을 수 있을 때 더 하고 싶다. (웃음) 소년 소녀 특유의 순진하고 푸릇푸릇한 감정은 오직 그 시절에만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욕심이 있다면 가족, 특히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그리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사실 해보지 못한 역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맡겨만 준다면 다 해보고 싶지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