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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숨겨진 이야기와 감정을 떠올리며, <노량: 죽음의 바다> 배우 허준호
이우빈 2023-12-29

배우 허준호의 연기는 늘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노량: 죽음의 바다>에 등장하는 명나라 장수 등자룡을 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등자룡은 왜 이순신을 그토록 따랐는가?” “왜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에서 깊은 상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렇게 스스로 답하는 과정을 곱씹는 것이 허준호의 연기 방식이다. 그의 확고한 연기 방식은 한 가지 더 있다.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대본을 열심히, 많이 읽는 것”이란 확신이다. “교과서만 읽었다”라는 전교 1등들의 고전적 레퍼런스처럼 들리는 말에 배우 허준호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탁월한 연기 비결이 있었다.

- 등자룡은 중국의 명장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어떤 방식으로 등자룡을 파헤쳤나.

= 중국에선 큰 인물이지만, 국내엔 등자룡에 관한 정보가 그다지 많지 않다. 역사적 맥락이나 고증은 감독님과 기획팀이 알고 있는 것을 따르면 됐다. 예전의 영화, 드라마에 나온 등자룡의 모습도 일부러 보지 않았다. 대신 ‘완전히 다른 문화, 다른 곳인 명나라에서 온 친구가 대체 왜 이순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주려 했을까?’라는 질문에 사로잡혔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본인의 혈연에게조차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이처럼 대본을 보며 든 상상을 통해 등자룡에게 접근했다.

- 상상을 통해 그린 등자룡은 어떤 인물이었나.

= 명나라에선 등자룡을 탈영병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명의 배도 아니고 이순신이 준 판옥선에 올라 출정하지 않나. 그렇게 하면서까지 이순신을 이해하고 존중한 인물이겠다고 생각했다. 대본에서 이순신과 등자룡이 스치는 순간들, 이를테면 필담을 나누거나 전략 회의를 했을 때 과연 그들에겐 어떤 숨겨진 이야기와 감정이 있었을지를 생각했다. 결론은 ‘이순신을 존중하다 못해 거의 사랑했구나’란 생각이었다.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연기할 때도 감정적인 측면에 훨씬 더 집중했다. 촬영이나 기술적인 부분, 무술 액션은 감독과 제작진에 맡겼다.

- ‘왜’라는 질문에서 연기를 시작한다면, 연기의 결과는 어떻게 받아들이나.

= 감독님이야 오케이, 엔지를 외치고 촬영감독, 조명감독의 표정은 늘 살필 수 있다. 그래서 현장에 있는 각 팀의 젊은 부원들에게 많이 물어보는 편이다. 언제나 극장가의 관객은 20, 30대가 많다. 당장 현장에 있는 20, 30대들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거다. 나는 점차 나이 들고 있고, 영화시장은 계속 젊어진다. 그들의 의견을 구하고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연기할 때뿐 아니라 홍보 일정을 소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요즘엔 특히 “어떤 표정을 지어달라”라는 절차가 많더라. 속으론 다소 힘들어할 때도 있지만, 도망가지 않고 다 하고 있다. (웃음)

- <노량: 죽음의 바다> 촬영 시 제작진의 의견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 사실 다 “좋았다”라고 얘기한다. 나쁜 얘기를 하기 힘들단 것을 안다. 그래서 표정을 본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진짜 반응을 포착해서 배우려고 한다. 늘 함께 다니는 소속사 동생들도 마찬가지다. 날 편하게 해주기 위한 마음인 거다. 그래서 지금 인터뷰처럼 기자들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고, 종종 인터넷에서 관객들이 올리는 평도 찾아본다.

- ‘대본’을 계속 언급하고 있다. 대본을 잘 이해하는 방식이 있다면.

= 샛길은 없다. 그저 대본을 많이, 여러 번 읽는다. 지금 찍는 다른 작품은 10번 이상 봤는데 오늘 또 봤다. 나이가 드니 생활이 단순해졌다. 거의 집돌이다. (웃음) 집에서 대본 보고, 잠깐 심심하면 TV 보다가 또 대본 보는 생활의 반복이다. 요즘은 아이패드가 나와서 더 좋아졌다.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메모하기도 쉽다.

- <노량: 죽음의 바다> 대본에 어떤 메모를 남겼는지 궁금하다.

= 비밀이다. (웃음) 이건 누가 내 클라우드를 해킹하기 전까진 아무도 못 본다

- 등자룡 연기는 중국어를 사용해야 했다. 어떻게 접근했나.

= 평소에 중국어를 제대로 써본 적은 없다. 그래서 외국어도 대본 외우듯 달달 외웠다. 전문가들이 직접 녹음해준 오디오를 듣고 연습하기도 했다. 그렇게 문장을 다 파악하고 난 뒤 현장에서 연기했다. 그러면 현장에 계신 중국어, 일본어 전문가들이 감독 모니터 옆에 항시 대기하며 수정을 해줬다. 이렇게 각 제작진, 전문가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야 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중국 사극에 나오는 과잉된 톤은 내지 않으려 했다. 그것보단 조금 더 자연스러운 소리를 원했다.

- 올해 개봉한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도 그렇고 VFX를 입히기 전의 그린 스크린에서 연기했다. 감정 몰입이 어렵진 않았나.

= 대본을 바탕으로 상상하면 문제없다. 연기에 몰입하면 주변 환경은 잘 안 보인다. 오히려 최근의 촬영장이 옛날보다 훨씬 좋다. 90년대엔 전반적으로 날것 가득한 촬영이었다. 필름이나 테이프 가느라 시간도 한참 걸리고…. 요즘은 조명도 가벼워지고 촬영 기술도 좋아져 배우들이 연기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이렇게 시스템이 좋아지니 나도 덩달아 신난다. 신나서 연기하게 된다.

-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에선 극악무도한 악역 범천을, <사냥개들>에선 선한 대부업자 최태호를, <노량: 죽음의 바다>에선 맹장 등자룡을 연기하며 굉장히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선악을 자유롭게 오간다는 반응이 많다.

= 너무 다행이다. (웃음) 그런 말을 듣고 싶어 매번 열심히 노력한다. ‘뭐라도 바꿔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임한다. 제작부, 연출부에서 주는 디렉팅을 다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다. 대사도 대본의 토씨 하나 안 틀리려 하고, 내가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 그래야만 내가 변신할 수 있다.

- 예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도 인물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허준호’는 지우고 시작한다고 말했다.

= 배우는 백도화지다. 스스로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단하거나 스스로 어떤 색깔을 지닐 필요도 없다. 결과는 남의 평가를 듣는 거고, 색깔은 감독과 작품이 입혀주는 거다. 등자룡 분장, 의상 테스트를 할 때 보니 생각보다 더 연로했더라. 하얀 수염도 길게 붙여져 있고. 그래서 처음엔 노인처럼 등도 굽고 자세를 숙이고 다녔다. 그런데 감독님은 점점 내 등을 펴고, 소리를 강하게 내며, 톤을 높이길 주문했다. 그러면 그것에 맞춰가면 된다.

- <노량: 죽음의 바다>를 보고 난 뒤 무척 슬펐다고.

= 싸움을 싫어한다. 사람간의 조그만 싸움도 안 좋아한다. <노량: 죽음의 바다> 촬영도 쉽지 않았다. 연기할 때야 몰입했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왜 다들 이렇게까지 싸웠을까?’란 느낌이 들더라. 지금도 세계에서 두 군데나 큰 전쟁을 하고있다. 서로 으르렁대고 싸우는 시대에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더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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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