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세이지마저 틱톡을 하는 시대다. 딸 프랜시스 스코세이지의 틱톡 계정에 올라온 영상에서 그는 현대 슬랭의 의미를 유추하는 챌린지에 도전했다(심지어 영상 속 인물들의 목소리를 장난스럽게 바꿔주는 필터까지 적용했다). 프랜시스 스코세이지가 ‘slept on’의 의미가 ‘과소평가’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코미디의 왕>을 예시로 드는 재미있는 순간이 담긴 이 영상은 틱톡에서만 240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지난해부터 틱톡과 공식 파트너 제휴를 맺고 ‘틱톡 단편영화 부문’을 신설한 칸영화제는 영화 제작 경험이 있는 틱토커들을 매년 공식 초청한다.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우리는 틱톡과 협력하면서 축제의 마법을 그 어느 때보다 넓고 세계적이고 많은 시네필 관객들과 공유하게 됐다”며 파트너십을 맺은 배경을 밝힌 바 있다. 틱톡의 약진에 대항하기 위해 2020년 구글은 60초 미만의 영상을 올리는 쇼츠를, 2021년 메타(옛 페이스북)는 인스타그램 릴스를 출시했으며 이들의 성장세도 눈에 띈다. 순다르 피차이 알파벳 최고경영자(CEO)에 따르면 유튜브의 숏폼 콘텐츠 쇼츠의 하루 조회수는 현재 700억회까지 상승했다. 메타는 올해 2분기 실적 보고에서 “페이스북 월간 활용 사용자 수(MAU)가 30억명을 넘어선 것은 쇼츠 플랫폼인 릴스의 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음악, 웹드라마, 홍보마케팅… 거의 모든 콘텐츠가 변했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왼쪽)이 제 76회 칸영화제 틱톡 단편영화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짧은 영상이 대세라면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창작 분야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이는 곳은 음악산업이다. 특히 틱톡은 지금 음악 발굴과 프로모션에 제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플랫폼이다. 찰리 푸스는 음악 작업하는 과정을 짧은 영상으로 찍어 틱톡에 여러 개 업로드한 후 유저들의 반응이 뜨거운 곡을 선별해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는 대표적인 아티스트다. 그는 2021년 9월17일에 스위치 켜는 소리를 이용해 음악을 만드는 모습을 담은 콘텐츠를 자신의 공식 계정에 업로드했고 이 영상은 조회수 1억회를 돌파했다. 그리고 2022년 1월20일 해당 음악을 완성시킨 싱글 《Light Switch》를 발표하며 온라인상 화제성을 빠르게 이어나갔다. 틱톡을 기반으로 광고, 매니지먼트, 제작 등 사업을 진행하는 박관용 순이엔티 MCN 사업본부장은 이처럼 숏폼 플랫폼이 음반 발매에 수반되는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몇억원 투자해도 잘 안될 수 있는 게 음악 시장이다. 그런데 틱톡이 사전에 집행해야 할 마케팅 예산을 절감해준다. 숏폼 콘텐츠의 경우 자연스러운 느낌이 묻어날수록 뷰가 잘 나오고 완성된 음악을 들려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아티스트가 올린 영상 수십개 중 조회수가 잘 나온 샘플 음악을 골라낸 뒤 본격적인 기획에 들어가는 식이다.” 최근 많은 가수들이 ‘Speed Up’ 등 다양한 리믹스 버전을 내는 것 또한 숏폼 플랫폼의 챌린지 문화를 의식한 것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웬즈데이>의 O.S.T (원곡 레이디 가가)는 한 DJ가 올린 리믹스 영상이 1억회 이상 노출되고 많은 사람들이 <웬즈데이>의 댄스 장면을 따라하면서 유행을 탔다. 발매된 지 10년 넘은 노래가 글로벌 음원 차트에서 역주행하게 된 이유다. 빌보드 핫100에 25주 차트인했던 피프티 피프티의 <Cupid>는 원곡의 비트를 빠르게 해서 다양한 영상에 적용할 수 있는 ‘Speed Up’ 버전을 따로 내놓으면서 틱톡 바이럴에 성공했다. 이 때문에 최근 가수들 사이에서 ‘Speed Up’을 포함한 다양한 리믹스를 내놓고 크리에이터들과 협업이 용이한 퍼포먼스를 짜는 기획이 부쩍 늘어났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요즘 숏폼 콘텐츠 플랫폼을 의식하고 노래와 안무를 짜는 사례가 매우 많다고 진단한다.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는 반복 청취가 유리하다 보니 개별 곡의 길이도 더욱 짧아지게 됐다. 숏폼 플랫폼 등장 이후에는 인트로부터 확실하게 대중의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도입부가 힘을 얻게 됐고, 15~20초로 잘 소비될 수 있는 특별 구간을 만드는 게 정말 중요해졌다. 이를테면 <Cupid>가 처음 주목받은 것은 후렴이 아니라 프리 코러스의 한 부분이었는데 그 파트가 여러 방식으로 가공되면서 ‘Speed Up’ 버전이 흥행하게 된 것이다. 올해 음악산업의 커다란 화두 중 하나가 바로 원곡에서 한두 템포 올리는 ‘Speed Up’ 음원이다.”
기획부터 공개까지 수년이 걸리는 영화나 시리즈의 경우 웹드라마나 홍보마케팅 분야의 변화가 먼저 감지된다. <더 글로리>의 경우 특정 장면 클립이 인기를 얻고 연진(임지연) 패러디가 일종의 챌린지로 번지면서 덩달아 작품도 더 유명해졌다. 올초에는 <더 글로리>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더 글로리> 이야기를 나누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서 보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였다. 웹드라마 <에이틴>을 성공시켰던 제작사 플레이리스트는 아예 1분짜리 짧은 영상만 올리는 채널 <숏플리>를 따로 운영 중이다. CU 브랜디드 콘텐츠 <편의점 고인물>은 회당 1천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류진아 플레이리스트 커뮤니케이션팀장은 “유튜브 쇼츠에 <잘 하고 싶어>의 홍보 클립 영상(최고 조회수 1459만회)을 올리면 본편의 뷰 수가 함께 증가한다. 숏폼 클립 영상이 시청자를 본편으로 연결하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셈”이라고 전했다. 이같은 흐름에 따라 드라마 1회가 공개된 후 숏폼 콘텐츠를 통해 유행을 만들려는 시도들도 늘어났다. “예전에는 사전 홍보에 주로 집중했다면, 지금은 사후 마케팅이 이전보다 많아졌다. 본편에 나온 장면을 패러디하는 등 밈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한다.”(박관용 순이엔티 MCN 사업본부장) 순이엔티 소속 한 틱토커는 ‘<더 글로리>의 연진 캐릭터 패러디’로 몸값이 50배 이상 오르는 등 시너지 효과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크리에이터들의 참여도 적극적이다.
영화계에서도 숏폼 유행의 효과를 누린 사례가 간간이 등장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유명 틱토커들이 영화 속 장면을 따라하는 콘텐츠가 개봉 초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작품의 인지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박주석 영화인 이사는 “챌린지를 따로 모으고 취합해 업로드하는 식으로 병행하긴 했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노력보다는 자발적 참여가 컸다”고 설명한다. “문을 여닫는 포인트가 영화의 특징을 잘 드러내면서도 활용하기 좋았다. 영화사, 마케팅사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붐업이 안되는 경우도 있는데 <스즈메의 문단속>은 자발적인 참여가 정말 많은 케이스였다. 결국은 영화 자체의 재미도 있지만 요즘 관객은 항상 재밌는 것을 찾는 것 같다. 숏폼 콘텐츠는 눈에 띄는 재미를 전달하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차차 이어지게끔 만들 수 있는 마케팅 방식이다. 콘텐츠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도 틱톡, 릴스, 쇼츠 등 숏폼 콘텐츠가 대부분 거론되는 편이다.” <더 마블스>는 마케팅을 위해 틱톡 플랫폼과 협업해 각자의 반려동물을 ‘구스’처럼 만들어주는 ‘구스 챌린지’ 필터를 제작했다.
“유저 친화적인 추천”
숏폼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하기 때문에 한번 조회수가 터지면 엄청난 파급력을 기대할 수 있다. 과거에는 K콘텐츠가 아시아 중심으로 인기를 모았다면 이제는 서구권에서 먼저 반응하기도 한다. 이같은 현상을 박관용 순이엔티 MCN 사업본부장은 “숏폼이 소비자와 크리에이터 습관을 바꾸었다”고 요약한다. 과거에는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장비부터 기술까지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면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 하나로 콘텐츠를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생산되는 콘텐츠 수 자체가 많아지면서 미국 시청자에게 노출되는 영상도 늘어났다. 한국이나 서구권이나 보는 눈은 똑같다. 막상 보니까 재미가 있어서 그쪽에서도 반응하는 것이다.”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던 시대를 지나 누구나 참여가 가능한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확산 속도도 빨라졌다. 홍종희 틱톡코리아 커뮤니케이션 총괄은 트렌드가 자리 잡는 과정을 단기적으로 트래픽이 증가하는 ‘순간’, 다양한 크리에이터들이 창작 활동에 뛰어드는 ‘시그널’, 오프라인에서도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는 ‘파워’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예전에는 영화나 드라마 제작발표회에 수십명의 기자들을 초청했다. 지금은 크리에이터들을 불러서 그들을 위한 세션을 따로 갖기도 한다. 플랫폼의 문법을 이해하는 크리에이터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콘텐츠를 갖고 놀기 시작하면서 화력이 커지면 마치 산탄총처럼 트렌드가 확산될 수 있다.” 그리고 유행을 퍼뜨리는 주체는 인플루언서에 한정되지 않는다. 홍종희 틱톡코리아 커뮤니케이션 총괄은 슬릭백 챌린지를 유행시킨 중학생의 계정에 업로드된 영상은 단 2개였음을 강조했다. “신문과 TV가 큐레이션한 콘텐츠를 우리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던 콘텍스트의 시대, 구글로 대표되는 검색의 시대, 친구들의 관심사를 업데이트받는 소셜의 시대를 거쳐 지금은 콘텐츠의 시대다. SNS 팔로워가 많지 않아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혹자는 숏폼 콘텐츠의 인기가 대중 전반의 집중력을 하락시켜서 롱폼의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틱톡, 쇼츠, 릴스의 인기가 올드 미디어를 몰락시키기보다는 수요를 세분화하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류진아 플레이리스트 커뮤니케이션팀 팀장은 “숏폼이 콘텐츠 저관여자(저소비자)에게 입문 역할을 한다면, 고관여자(고소비자)에게는 분량이 긴 롱폼이 적합하다”고 구분했다. 롱폼이기에 담을 수 있는 정보값과 연출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긴 영상의 가치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박관용 순이엔티 MCN 사업본부장은 “10대들은 짧은 것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보고 싶은 영상을 보는 것뿐”이라고 설명한다. 지금 숏폼의 수요가 높은 것은 이용자들이 짧은 영상을 재미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시청률 26.9%를 기록하고 <아바타: 물의 길>이 1080만 관객을 동원한 것처럼 1시간짜리 드라마나 2시간짜리 영화도 흥미롭다고 느껴지면 충분히 소비될 수 있다. “다만 숏폼 플랫폼은 유저 친화적 추천을 해주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있다”고 부연했다. 제목, 장르, 섬네일, 무엇보다 영상의 길이가 먼저 노출되는 롱폼은 유저가 직접 찾아봐야 하지만 숏폼은 가만히 있어도 소비자의 니즈에 맞는 콘텐츠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같은 특성 덕분에 예상 범주를 벗어난 분야에 노출되고 관심을 갖는 일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숏폼 플랫폼의 저변이 넓어지면 보다 다양한 소비층을 끌어모을 수 있고 이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문화도 달라질 것이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가장 젊은 플랫폼으로 거론됐던 유튜브가 트로트 팬덤이나 정치 콘텐츠의 소비층을 품게 된 것처럼 지금의 숏폼 플랫폼 역시 음식과 라이프스타일로 점차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해외에는 영화 리뷰어 중 이미 수백만 팔로워를 거느린 계정도 늘어나는 추세다. 만약 마틴 스코세이지의 틱톡 영상을 보고 “가장 과소평가된 영화” <코미디의 왕>을 감상하는 새로운 영화팬이 있다면 어떨까. 숏폼은 가장 정반대에 위치한 것처럼 보였던 매체를 뜨거운 관심사로 등극시키기도 한다. 능동적인 참여와 빠른 유행이 가능한 플랫폼의 등장을 제로섬게임이 아닌 변수의 다각화로 인식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