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엔 발목에 검은 별이 그려진 금색 양말을 신었다. 내 양말 서랍에서 가장 무난한 디자인이었다. 반짝이, 땡땡이, 형광, 야광, 레이스…. 서랍 속을 한참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7년 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친구 S는 밥을 먹다 말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가 검정색 옷만 입는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공포일 수도 있어.” K도 옆에서 거들었다. “어떨 땐 너가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 같기도 해.” 어떻게 사람에게 그림자라는 그런 심한 말을…. 나는 말문이 막혀서 대꾸할 수 없었다. 가게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그날따라 더 그림자 같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충고는 일리가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검은 옷만 입던 내가 갑자기 무지개색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다면 그들은 그 모습에 더 커다란 공포를 느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검정 옷을 고수하면서도 나의 내면에 자리한 사랑스러움, 귀여움, 순수함을 은은하게 드러낼 방법은 없을까? 액세서리 착용을 가장 먼저 떠올렸지만 촌스럽고 가난한 나는 도금 알레르기가 있었고, 금붙이를 살 만한 재력은 없었다. 속옷은 화려한 것을 입어도 ‘은은하게’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한 수단이었고, 모발 염색은 내 지독한 곱슬머리가 거부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적당히 숨겨져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 사람의 내면을 뒤집어 보이는 궁극의 패션 아이템. 바로 양말이었다. 내 서랍장 속 광기는 바로 그날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현란한 양말을 모으고, 빨간 끈으로 머리를 묶고, 큐빅을 붙인 네일아트를 하고, 가방에 인형을 달고…. 나는 나의 밝고 귀여운 이면을 누군가 알아봐주길 바라면서 부단히 작은 노력들을 했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영화에 ‘이스터 에그’를 심듯이. 하지만 지독하게 재미없는 영화는 아무도 보지 않을 텐데 그 안에 숨겨진 ‘이스터 에그’ 따위를 누가 찾으려 하겠나? 어찌나 치밀하게 숨겼는지 사람들은 ‘나만 아는 노력’을 정말 나만 알게 두었다. 내가 가방에 어떤 깜찍한 인형을 달았는지, 내가 얼마나 화려한 레이스 양말을 신었는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그저 늘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탁하고 우중충한 사람일 뿐이었다.
스스로의 어둠에 질려서인지 나는 어디에서도 한눈에 알아차릴 만큼 돋보이는 사람들이 좋았다.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한 노출을 하는 사람, 때가 되면 온갖 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오는 사람, 코스프레에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까지…. 그래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은 모두 좋았다. 그중에서도 ‘솔로 가수’는 가장 크고 반짝거렸다. 엄정화가 팔을 흐느적대며 ‘오늘 밤 그대를 유혹하겠다’ 속삭일 때, 박지윤이 가쁘게 숨을 쉬며 ‘장미 한 송이를 내게 달라’고 할 때, 비가 온몸의 관절을 흔들며 ‘나는 나쁜 남자’라고 절규할 때, 그리고 이 모든 무대를 프로듀싱한 ‘최고의 솔로 가수 메이커’ 박진영이 비닐 바지를 입은 채 ‘날 떠나지 말라’며 붙잡을 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참을 느꼈다. 커다란 무대와 카메라를 독점한 이 단독자들이 내 눈엔 누구보다 특별하고 위대해 보였다. 도대체 누가 한국에 다인원 그룹의 시대를 연 것인가? 기회만 있다면 K팝 자본가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제발 그룹 좀 그만 만들고 다시 솔로 가수의 세상을 돌려달라고.
나처럼 솔로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우리에게 옛날 가요 무대는 누군가 이미 수령한 로또 당첨지를 주워서 몇번이고 쓰다듬는 슬프고 황홀한 일이라는 것을…. 1995년 <KBS 가요대상> 마지막 무대를 보라. 전 출연자가 한데 모여서 그해 최고의 히트곡 <잘못된 만남>을 한 소절씩 부르는, 조회수 170만회의 영상을. 긴장해서 박자를 놓쳤지만 이내 총학생회장의 씩씩한 발성으로 랩을 하는 이선희, 자신들만의 풍부한 성량과 시원한 창법을 유지하며 노래하는 신효범, 인순이, 박미경, 20년이란 시간이 지나 이 영상을 통해서 새삼 가창력을 인정받은 설운도,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기싸움이 제일 중요한 태진아와 송대관, 들으면 귀가 든든한 유열의 목소리, 이제는 한없이 그리워질 박정운의 얼굴, 잔뜩 긴장한 신인 가수 성진우, 나란히 서서 가사지를 나눠 보는 현철과 박진영,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주현미와 김수희의 디너쇼 모먼트까지. 나는 그 모든 순간을 가능한 한 오래 느끼고 싶어 몇번이고 재생을 반복한다. 아이돌 그룹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직전 솔로 가수 전성시대, 그 아름다운 최후를.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왜 나는 선글라스를 낀 채 양손으로 총을 쏘는 미남 가수 심신의 젊은 시절을 함께할 수 없었는가! 이 글에 유튜브 영상을 첨부할 수 없는 것이 한없이 슬프다! 젊은 심신이 선글라스 뒤의 우수에 찬 눈을 드러내며 ‘어디서 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랑은 이렇게 달콤한 것’이라 할 때, 세상의 모든 근심이 설탕처럼 녹는데, 그 경험을 지금 바로 나눌 수 없다니! 세상에서 가장 하얀 원피스를 입은 강수지가 목을 45도로 기울인 채 ‘다시는 또 다른 슬픔이란 없는 것’이라 할 때, 내 안의 잠재된 모든 슬픔이 아름답게 부서지는데 그 환상적인 기분을 공유할 수 없다니! 하늘은 왜 이은하, 민해경, 김완선, 전영록, 양수경, 이상은, 강수지 등등을 낳고, 한참 뒤에 나를 낳았는가!
주변인들의 인식 속에 나는 늘 검은 옷을 입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를 ‘프란체스카’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은 나를 ‘모나리자’라고 불렀으며, 어떤 사람은 나를 ‘검은 사제들’ (나는 한명인데 대체 왜 검은 사제‘들’인지…)이라고 불렀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입은 검은 옷 때문에 나는 오히려 솔로 가수 같은 존재감을 갖게 된 것이다. 오늘도 나는 지나간 솔로 가수들의 무대를 본다. 혜은이부터 시작한 영상은 보아를 거쳐 아이유까지 내려오고 감격 뒤에 어렴풋한 깨달음도 밀려온다. 내가 솔로 가수에 열광한 이유는 모두가 반할 만한 화려한 겉모습 때문이 아니라, 커다란 무대에 홀로 서서 관객에게 호소하듯 보내는 그 외롭고 쓸쓸한 눈빛 때문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