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예산 편성 결과 지역 영화문화 활성화 지원사업의 예산이 아예 사라졌다. 지역 영화문화 활성화 지원사업 8억원, 지역영화 기획개발 및 제작지원 사업 4억원이 하루아침에 0원이 된 것이다. 충격적인 사태를 맞이한 각 지역의 독립영화협회를 대표하는 지역영화 네트워크에서는 9월12일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의 요구는 두 가지다. “1. 영진위 지역영화 관련 사업을 원상 복구하라. 2. 일방적인 사업 폐지와 예산 삭감을 철회하고 지역 영화문화 발전을 위한 논의 테이블을 구성하라.” <씨네21>에서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목소리를 듣고자 강원, 대구, 인천, 전북 네 지역의 독립영화협회 대표를 한자리에 모았다. 이번 사안은 단지 지역영화에 대한 예산이 사라진 것을 넘어 지역 그리고 영화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단적으로 드러낸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와중에 8월 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문화·예술도 경쟁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 쥐꼬리만 한 예산을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경쟁이 될까? 생계 보조형 지원은 그만해야 한다… 좁은 문을 만들어 철저히 선별해야 한다”라고 밝힌 바 있는 유인촌 대통령비서실 문화체육특별보좌관이 차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상황이다. 세찬 비바람은 바닥을 더욱 단단하게 다질 계기를 마련하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문화지원정책 전반에 대한 몰이해의 시간이 이어질수록 거꾸로 지역영화의 정체성과 독립영화의 필요가 또렷해진다.
- 2024년 영진위 예산 계획에서 지역 영화문화 활성화 지원사업 부문이 아예 사라졌다. 이번 예산 삭감에 독립영화협회 각각의 입장을 먼저 듣고 싶다.
김진유 산업의 논리보다는 문화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유감스럽다. 영진위의 지역 영화문화 활성화 지원사업으로 짧은 기간 많은 성과들이 있었다. 각 지역에 워크숍이 생기고 지역 문화인이 발굴되는 중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역에서도 영화창작을 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번 결정은 이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지역 영화인들의 창작 의욕에 찬물을 끼얹을 우려가 있다.
최창환 독립영화는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제작 지원이 반드시 필요한 기초 예술이다. 이번 예산과 관련한 결정은 큰 틀에서 보면 해당 지역에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좋게 말해서 지역의 자생적 뿌리를 만들라는 거지 솔직히 말하면 방치하겠다는 거 아닌가. 물론 지역 영화인들은 지역에서 지원하는 게 원칙적으로 맞다. 하지만 그걸 지역이나 중앙,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몰고 가선 안된다. 각 지역의 사정에 맞춘 지역 지원과 중앙에서 기초 예술에 대한 창작 지원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중앙정부에선 매번 지역 활성화와 문화 향유권을 말하면서 정작 본인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란희 ‘지역영화’라는 이름으로 장벽을 세우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인천공항을 지을 때 인천시 돈으로만 지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최창환 감독이 지적했듯 이건 기초 예술 지원에 대한 문제다. 그간 지역 영화인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었는데, 아무런 협의 과정 없이 단번에 백지화하겠다는 건 그간의 성과를 무시하는 처사다. 지역에서의 활동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박영완 지역마다 상황이 다르다. 예를 들면 대구 지역은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분들이 많아서 자생력이 높다. 인천 지역은 서울 인접이라는 특수성이 있고 영진위의 활동이 정말 활발하다. 솔직히 부럽다. (웃음) 때문에 영진위처럼 영화인 전체를 지원하는 입장에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창환 맞다. 대구 지역 영화인들은 예전부터 오랫동안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기에 전투력이 있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자면 문예진흥기금이 있을 때 지역 예술가들을 위한 지원은 주로 미술, 무용 등 다른 분야에 집중되고 영화는 한참 뒤 순번이었다. 그 시절 단편영화 제작 지원을 낸 적이 있는데 심사할 때 왜 부산에서 내지 않고 대구로 지역을 해서 제출했냐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분야별, 지역별 편견을 뚫고 독립영화제작지원, 다양성영화제작지원 등 이름이 여러 번 바뀔 때도 버텨왔는데 이번처럼 한번에 예산 자체가 일방적으로 사라진 적은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
| 일방적인 사업 백지화 통보 |
- 지역 독립영화협회는 설립 과정부터 걸어온 길이 조금씩 다르다. 그간의 과정을 짧게 소개해주면 좋겠다.
최창환 대구독립영화협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여기 계신 모든 대표님들과 마찬가지로 6편의 영화를 찍은 감독이기도 하다. 대구독립영화협회의 출발은 연출, 제작자 중심이었다. 이후 활동가들이 합류하며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2000년부터 대구단편영화제를 개최하고 지역 최초 독립영화전용관인 오오극장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박영완 2019년부터 전북독립영화협회 이사직을 맡아 활동 중이다. 전북독립영화협회는 전주국제영화제를 계기로 만남과 교류를 넓혀가던 독립영화인들이 2000년부터 시작했다. 시민영화제, 영상모임, 시민영상제작학교 등 제작부터 교육까지 지역 영화인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일하고 있다.
이란희 인천독립영화협회 이사직을 맡고 있다. 인천독립영화제 프로그램팀장이기도 하다. 2013년 시작된 인천독립영화제는 서울 인근이라 서울 인프라를 활용하기 용이하다. 작품 제작할 때 영화는 인천에서 찍고 사무실은 서울 상암에 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인천은 주로 제작자보다는 지역 활동가들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지금도 창작자들은 30, 40%다. 그러다보니 창작 지원보다는 일반인 대상 교육프로그램이나 마을영화교육, 청소년 영화교육 등 지역문화 활상화쪽에 힘을 쏟는 편이다. 커뮤니티 시네마, 영상 아카이빙 사업, 지역영상 포럼 등도 지속적으로 진행 중이고, 인천독립영화제도 10회까지 치렀는데 11회를 맞는 올해는 개최를 못했다.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단번에 생명선이 끊어질 줄은 몰랐다.
김진유 강원독립영화협회를 대표해서 나왔다. 강원독립영화협회는 강릉, 춘천, 원주 세 지역이 교류를 강화하다가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세 지역의 공동체다보니 예산을 받아도 각 지역이 3분의 1씩 나눠 가지고 각자의 사업을 하는 구조다. 전반적으로는 강원영상위원회와 긴밀히 협력하며 영화학교 등 영화인들의 지원과 육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트워트라고 생각한다. 강원은 강릉의 인디하우스, 원주의 원주영상미디어센터 등 각 지역의 토대가 되는 기관들이 있다. 지역간의 원활한 교류와 광역 단위의 거점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역 네트워크를 연결하고 강화해나가는 게 목표다.
- 영진위의 지역 영화문화 활성화 지원사업의 핵심도 네트워크 강화였던 걸로 안다.
박영완 맞다. 지역영화에 대한 소외를 걷어내고 연결해나가자는 요구에 힘입어 겨우 시작된 사업이다. 영화발전기금이 지역에서 걷히는 부분이 있는 만큼 일정 부분 지역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그런 구조가 없었다. 이런 불합리한 시스템에 대한 꾸준한 지적이 있었고, 영진위 안에 지역영화에 대한 목소리를 정확히 전달해줄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필요에 따라 지역소위원회가 생기는 등 차근차근 받아들여준 끝에 여기까지 왔다. 지역영화 활성화의 핵심은 단순히 개별 지역의 육성이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지역간의 교류와 유기적인 연결이다. 해당 지역에서만 한다면 지역간 편차가 생길 수밖에 없고 유지되는 지역만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구조로 갈 거다. 그걸 조정해주는 게 중앙의 역할이었다.
김진유 알다시피 모두 열악한 가운데 서로 다른 고충들이 있다. 그래서 교류가 필요하다. 2022년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서 열린 명랑운동회도 그런 취지에서 마련됐다. 지역영화제작 현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서로 에너지를 나눌 만남의 장이었다. 올해는 전주에서 명랑 골든벨이 열렸다. 네크워크를 두텁게 하며 밝은 미래를 꿈꾸던 중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존재를 부정당했다.
이란희 영진위도 그런 방향으로 단계를 밟아나가는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백지화가 됐다. 지역 예산이 줄었다는 것보다 충격적인 건 준비할 시간을 가질 새도 없이 아예 없어졌다는 거다. 이제껏 구축했던, 이제 막 시작된 연결들이 단번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상황에 따라 정책이 바뀔 수도 있지만 이렇게 연속성 없이 방향을 트는 건 무책임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솔직히 투입되는 예산 대비 성과를 논하자면 지역 영화문화 활성화 지원사업은 그야말로 순항 중이었다. 12억원 남짓한 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들, 진행된 행사들을 제대로 검토했다면 이런 결정을 내릴 순 없다.
김진유 내가 연출한 <나는 보리>도 지역영화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미 지자체나 지역영상위원회에서도 제작지원을 할 때 영진위의 지원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50 대 50으로 서로가 서로의 마중물이 되어주고 있던 상황이다. 그런데 한쪽이 갑자기 없어지면 다른 한쪽도 지원의 근거가 사라져버리는 셈이다.
박영완 지역영화 소위원회가 있고 여기 김진유 감독님이 위원으로 최선을 다해주고 계시지만 지역 영화인들의 목소리와 상황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듣고도 모른 체하는 건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 자리에서 굳이 영진위를 탓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동안 실무적으로 애써온 부분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무기력하게 사업 백지화를 통보받는 입장에서 먹먹한 게 사실이다.
| 지역영화 네트워크의 향방은? |
-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 방향은 중앙 중심이 아니라 지역에서 자생하는 방안을 모색하라는 거다. 지금 상황은 이런 기조에 따른 전형적인 행정편의주의적인 접근처럼 보인다. 지역 자생은 다른 말로 각자도생하라는 것처럼 들린다.
최창환 사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가 없어지면서부터 전조는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줄은 몰랐다. 이란희 감독님 말씀처럼 정확한 분석과 상황에 따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협의 과정도 없었고 그저 얼마 되지 않는 예산이니 치우자는 식으로 사라진 것 같다. 입으로만 지역 발전을 떠들지 지역문화를 기반에 둔 지역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의 생가를 복원하자는 수준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 아니겠나.
김진유 소위원회에서 활동해보니 의견을 나누고 토론한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결정된 내용을 통보받는다는 느낌이 있다. 영진위는 이름 그대로 위원회 구조가 되어야 한다. 여느 문화재단이나 정부 산하 기관단체와는 설립과정과 목적이 다르지 않은가. 영화계 종사자들, 다양한 위원들의 목소리를 모으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데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위원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영화인들의 목소리와 요구에 귀 기울이고 필요할 때 앞에서 싸워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최창환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2018년부터 시작된 지역영화 지원 사업이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거다. 지역영화가 무엇인지 물으면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것?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것? 지역 출신이 만든 것? 각양각색이다. 그런 논의들이 이어지고 조금씩 정돈되어가던 상황이었다. 5년 만에 간신히 이만큼의 방향을 잡고 네트워크의 기틀을 다져놓았는데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이걸 다시 만드는 데 들어가는 기회비용은 또 어떻게 할 건가. 그사이에 사각지대로 내몰릴 지역 영화인들은 또 어떻게 하나.
이란희 지역영화 활성화 사업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가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제작된 영화들도 투입 예산 대비 매우 높은 성과를 거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제 수상 같은 실적 외에 더 중요한 건 지역 영화인들 사이의 연대와 교류다. 이렇게 애쓰고 뿌리내리려 하는 게 혼자가 아니라는 확인 말이다. 이런 공감대는 나아가 지역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확장으로 연결된다. 서울독립영화제에 ‘로컬시네마상’이 생긴 것도 그런 흐름의 결과물이다. 엄격히 따지자면 지역에서 활동하고 지역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지역영화겠지만 확장하고 교류하며 넓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담론의 장을 만들어가던 중이었다.
박영완 영진위의 지역 영화문화 활성화 지원사업을 지원받기 위해 지역으로 내려와 영화를 찍는 경우도 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감독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지역으로 내려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영화의 핵심은 지역에만 한정하는 폐쇄성이 아니라 지역을 기반으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네트워크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보완점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영진위의 지역영화 활성화 사업은 그런 방향성이 있었다.
- 예산 결정은 이미 주관부서인 영진위의 손을 떠난 상태다. 향후 지역영화 네트워크의 활동은 어떻게 이어나갈 계획인가.
김진유 예산 전액 삭감이라는 결론도 문제지만 결정 과정에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산 2차 예산 심의가 9월20일에 열리는 걸로 알고 있다. 우선 입장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논의 테이블을 마련하길 원한다. 국회의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만나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방법도 있다. 이후 상황을 보고 다양한 방법으로 단체행동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이란희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하나 위안이 된 건 지역영화를 지지하고 뜻을 함께해주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확인한 거다. 성명서에 함께해주신 분들의 명단을 보며 큰 위로를 받았다. 보이지 않는 형태로 연결된 의지를 확인하며 그동안 우리의 활동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걸 실감했다. 동시에 더 넓게 관심을 가지고 소통해야겠다는 반성도 했다.
박영완 우리는 이게 문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어코 한줌 희망을 발견해내고야 만다. (웃음)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