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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익숙한 듯 새롭게 거듭나는 페촐트 영화의 지도
송경원 2023-09-14

<어파이어>

1970년대 시작된 뉴저먼 시네마 이후 새로운 독일영화의 흐름의 제일 앞자리에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이른바 베를린파의 1세대로 분류되지만 정치적 진보성을 기반으로 인위적인 내러티브에 반대하며 절제된 이미지를 특징으로 하는 이후 베를린파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장르의 해체와 재구축을 지향하며 역사의식과 공간을 매개로 정체성에 관한 드라마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어파이어>라는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며 역사, 공간 그리고 멜로드라마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페촐트의 지난 궤적을 더듬어 정리해보았다. 경계를 나누고 구분 지어진 것을 유령의 신체로 관통하는 것이 페촐트의 본질이라는 걸 상기하면 이건 바보 같은 시도다. 그럼에도 부재와 실패를 통해 현재를 자각하는 페촐트의 의지를 따라 실패를 전제로 나눠보고자 한다. 페촐트는 <운디네> <어파이어>로 이어지는 원소 3부작을 분기점으로 익숙한 듯 새롭게 거듭나는 중이다. 나아가는 듯 다시 원점으로 순환 중인 페촐트 영화의 지도가 여기에 있다.

역사 “교란된 시간”

<트랜짓>

<바바라>

역사 3부작 <바바라>(2012), <피닉스>(2014), <트랜짓>(2018)역사 3부작으로 불리는 시기에 이르면 페촐트는 본격적으로 역사를 소재의 전면에 내세우며 뒤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바바라>처럼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 동독의 삶을 조망한다든지 <피닉스>처럼 헤어진 연인이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는 과정을 독일의 역사에 빗대어 일종의 대체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누락된 기억을 누아르 장르의 틀에 접합하는 <피닉스>는 시간을 교란시켜 역사를 재구성하도록 유도한다. <트랜짓>에 이르면 이러한 역사적 상상력은 거의 판타지영화의 영역까지 다다르는데, 불법 체류자 친구의 부탁으로 시작한 <트랜짓>은 2차 세계대전이란 과거와 21세기 현재를 중첩시킨다.

원소 3부작 <운디네>(2020), <어파이어>(2023)

<운디네>

멜로드라마는 이윽고 전설로 승화한다. 도시의 기억과 역사를 신화적으로 풀어낸 <운디네>를 시작으로 페촐트는 원소 3부작의 문을 열었다. “신화나 설화는 오랜 시간을 거쳐 회자되며 집단적으로 수많은 이들이 함께 쓴 텍스트다. 나에게 영화는 신화나 동화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라며 독일 낭만주의의 맥을 잇는 작품을 기획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물을 주제로 한 <운디네>에 이어 신작 <어파이어>는 불을 매개로 한다.

공간 “배회하는 유령들”

<유령>

<옐라>

유령 3부작 <내가 속한 나라>(2000), <유령>(2005), <옐라>(2007)사실 그의 모든 영화가 유령의 영화다. 페촐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인물과 공간이 관계 맺은 결과물이라 해도 좋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힌 채 낯선 장소(혹은 장르)를 배회하는 유령의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야기와 장르 공식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페촐트의 모든 영화는 배회하고 떠도는 이야기다. 역사를 본격적으로 우화의 틀로 삼은 역사 3부작이나 전설을 모티브로 한 낭만 3부작에 비해 초기 유령 3부작은 훨씬 간명한 서사 구조로 진행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역사성을 소거한 멜로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이 시기의 영화들은 여성을 피학적인 위치에 놓고 좌절과 실패를 반복한다.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를 자주 사용한 후기작들에 비해 훨씬 직접적인 폭력이 등장한다. 초기작은 스릴러, 서스펜스의 장르 언저리를 배회하면서도 회복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갈망이라는 멜로드라마적 동력을 유지한다.

서사 “멜로드라마적 순환”

<내가 속한 나라>

<볼프스부르크>

페촐트의 첫 장편영화 <내가 속한 나라>는 10대 소녀의 시점을 따라가는 로드 무비다. 하룬 파로키가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쓴 이 영화는 유럽을 떠돌며 좌파 테러리스트였던 부모 때문에 15년간 도피를 이어가던 한 가족이 가진 돈이 모두 떨어진 후 어쩔 수 없이 독일로 돌아가는 상황을 그린다. 이후 역사의식을 투영하여 부재하고 거부되는 과거, 머물지 못한 채 배회하는 공간의 드라마로 확장되는 흐름의 원초적이고 거친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 극장 장편영화 <볼프스부르크>(2003)는 특정 지명을 제목으로 했지만 영화에선 스쳐 지나가며 언급될 뿐이다. 베를린파라고 불릴 만큼 공간의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페촐트의 영화는 모두의 역사, 공공의 공간을 미시적인 균열로 쪼개어 충돌시킨다.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로 떠나거나 부재하는데 이것이 회복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드라마로 이어진다. 본질적으로 분리와 실패, 부재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는 멜로드라마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이야말로 시공간을 초과하여 인물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해 불가능한 감정이기에 페촐트는 필연적으로 멜로드라마적 열망을 경유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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