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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쓸쓸함도 황량함도 노래가 된다, 독일영화의 좌표에서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자리 찾기
이준서 2023-09-14

<열망>

처음 본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인 <내가 속한 나라>에서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차창 밖으로 달려가는 유럽의 풍경과 그 풍광을 담고 있는 동경 어린 소녀의 눈망울은 쓸쓸하기 짝이 없다. 부모가 좌파 테러리스트라 쫓겨다니는 통에 자기가 선택하지도 않은 떠돌이의 삶을 살아가는 소녀에게는 자신의 자리인 세상의 점 하나가 간절하다. 점이 없으니 선도 없다. 내부 안전을 위해 세상 누구와도 연결되면 안되니 내면의 안정은 찾을 길이 없다.

그렇다면 1960년 서독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태어난 페촐트의 자리는 어디일까?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온다. 독일이다. 독일 감독이니 당연한,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러니까 활동 영역을 뜻하는 게 아니고 국적을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시점이 독일에 있고,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도, 그의 시야도 독일이다. 이는 오랫동안 정체되었던 독일영화계에 1990년대 이후로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던 동료 감독인 도리스 되리, 톰 튀크버, 올리버 히르슈비겔, 플로리안 헹켈 폰 도네르스마르크의 행로와 비교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주제들이 그가 언제나 현재 독일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68 학생운동의 잘못된 유산인 적군파 테러리스트들의 유령 같은 삶,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를 맞은 자본주의국가 독일의 도덕적 함몰, 그곳에서 일찌감치 낙오자이자 국외자가 된 청소년들, 통일 뒤에 나타난 또 다른 동서의 비대칭, 전범국가 독일의 해외 파병과 그 후유증, 독일 내 터키 이민자들의 고단함, 사회주의 독재국가 동독의 억압 체계, 나치 독일의 수용소와 정치적 난민의 생존 문제, 신자유주의 사회의 사랑, 능력사회의 폐해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선은 늘 독일을 맴돈다.

사회에서 개인의 문제로

그렇다고 신독일영화의 선배 감독들처럼 직접적인 사회 비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노선이 선명한 것도 아니다. 베를린파라는 범주의 실효성을 믿지는 않지만, 그 대표주자답게 사회의 큰 사건보다는 일상 속 인물들을, 대우주와의 격돌보다는 개인들의 소우주를 바라본다. 사회적 모순에 대한 해결 방법이나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 꺾이는 순간을, 선한 피억압자보다는 가해자가 되는 피해자를 차분히 그려낸다.

그러나 페촐트의 매력은 이렇게 사회의 민감한 지진계 역할을 하는 것으로 소진되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의식은 매번 인간의, 또는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철저하게 독일적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 과정은 전적으로 탐색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는 자신이 스크린 위에 펼쳐 보이는 세상의 전지전능한 창조자처럼 굴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결코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사람의 계획은 우발적 사건들을 통해 끊임없이 엎어진다. 그렇기에 연민과는 거리가 먼 객관적인 탐색의 시선과 시선이 가닿지 않는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무엇인가가 언제든지 뒤엉킬 수 있다. 또 한명의 독일 거장 감독인 안드레아스 드레젠의 세계에 마법 같은 순간들이 있다면 페촐트의 세계에는 미스터리와 신비로움이 대기 중에 떠돈다.

물론 이러한 탐색의 모습은 정밀하고 섬세한 수공예의 결과물이자 오랜 성찰의 산물이다. 이제는 루틴이 된 듯한 삼부작 구조가 그 극명한 증거다. 삼부작의 경향은 그가 자신의 주제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얼마나 끈질기게 천착하는가를 방증한다. 또한 직접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배우들과 촬영을 준비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다른 예술작품들과의 대화가 늘 동반된다. 그가 영화를 공부하기 전에 독문학과 연극학을 전공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미나’라 불리기까지 한다는 배우들과의 준비 과정에는 주로 영화와 문학작품들이 ‘교재’로 쓰인다. 그것들을 골라내는 솜씨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난다. 평소에 열심히 읽고 본다는 얘기일 뿐 아니라 읽어내는 능력 또한 뛰어나며 응용력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다층성과 상징성은 문학의 영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회화의 영향은 무엇보다 그의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황량한 풍경에서 드러난다.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의 화풍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상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이며 위태로운 존재인가를 느끼게 해준다. 바바라가 탈주 자금을 감추러 바위 더미로 갈 때면 바람은 또 어찌나 부는지. 어쩌면 베를린파 미학의 핵심 개념인 ‘분위기’의 요체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중적인 시선

<내가 속한 나라>

페촐트는 자신의 인물들에게 해피 엔드를 선사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에게 과거의 흔적들이 지워져 있듯이, 영화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또한 늘 열려 있다. 오히려 그들 뒤로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때로는 서서히 그것에 잠식당하고 때로는 난데없이 급습당한다. 이것이 페촐트의 낭만주의적 리얼리즘이다. 그렇기에 신산한 인생의 뒷맛이 영화관을 나선 뒤에도 여운처럼 남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차갑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인간적인 면모는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온기에도 종류가 있는 법이다. 드레젠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동독 출신으로 포츠담 바벨스베르크 영화·텔레비전 대학교를 나온 드레젠에게서 무조건 내 편일 것 같은 푸근한 엄마의 따뜻함이 느껴진다면, 서독 출신에 베를린 독일 영화·텔레비전 아카데미를 나온 페촐트에게서는 젊은 감각을 유지하며 짚고 넘어갈 것은 짚고 넘어가는 이성적인 아빠의 따뜻함이 느껴진달까. 드레젠의 영화에 동트는 아침의 노릇한 붉은빛이 감돈다면, 페촐트의 영화는 그 두 시간쯤 전, 푸르스름함이 가라앉아 있는 풍경을 담는다. 드레젠이 여명으로 독일 사회의 아래쪽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감싸안는다면, 페촐트는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나 그 푸르스름함 속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이중적이다. 그들을 밖으로 내모는 냉혹한 사회를 직시하는 냉철함 안에 곧 퍼져올 따스함이 담겨 있다. 이렇게 그의 영화에서는 쓸쓸함도 황량함도 노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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